1.
"… 아직도 젓가락질을 왼손으로 하는구나."
설날에도, 추석에도, 다른 가족모임이 있을 때도, 둘째 외삼촌은 나에게 말을 붙일 때면 언제나 젓가락질 이야기로 물꼬를 트시곤 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20년도 넘는 기간 동안 그렇게 같은 말을 되풀이할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비범한 재능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주 어릴 적엔 속으로 '또 그 소리다!' 하며 진저리를 쳤지만, 언제부턴가 그것이 서먹한 조카와의 소통을 바라는 당신 나름의 노력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난 다음부터는 외가 친척들을 만날 때마다 이번엔 언제쯤 그 얘기를 꺼내시려나 싶어 은근한 기대까지 품게 되곤 했다. 일이 잘못되어, 가끔 북적대는 식구들 속에서 홀로 사색에 잠겨 반주로 위스키만 홀짝이는 외삼촌을 볼 때면 나의 존재는 아예 잊으셨나 싶어서 괜히 오른손으로 서툰 젓가락질을 해대며 관심을 끌어보려 나름대로 애쓴 적도 몇 번 있었다.
아무튼 간에, 그렇게 걸어오시는 말씀에 내가 매번 어떤 식으로 답했는지는 정확히 생각나지 않는다. 추억의 생산은 순간적이지만, 시간의 무한한 풍화작용은 언제나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깎고 또 바스라 뜨려 망각의 강물 위로 흘려보내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의 기억이 조금이라도 더 남아있을 때 자세히 기록해 놓는 것이 외삼촌에 대한 마지막 예의라는 생각이다.
- 날빛보다 더 밝은 천국, 믿는 맘 가지고 가겠네.
흐리게 채색한 수채화처럼 눈가가 뿌옇게 물들어올 무렵, 외숙모가 내 곁에서 무너져 내린다. 그녀의 아픔을 함부로 이해하는 척해서는 안 된다. 그녀의 들썩이는 어깨를 함부로 감싸 안아서도 안 된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 믿는 자 위하여 있을 곳, 우리 주 예비해 두셨네.
이미 삼십 줄을 훌쩍 넘은 두 사촌형의 입에서 '아빠, 아빠 가지 마'라는 소리를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만사에 초연한 줄로만 알았던 우리 엄마의 입에서도 '오빠, 고생만 하다 간 불쌍한 우리 오빠'라는 울음 섞인 소리가 게가 무는 거품처럼 어지러이 쏟아져 나와 영안실을 메운다.
-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마지막 숨을 내쉬고 난 다음, 외삼촌의 주검은 한없이 여위고 또 여위어 있다. 마치 태아처럼 고요히 웅크린 모습으로. 외할머니의 몸에서 세상으로 나와 첫울음 우실 때의 모습이 저러했을까. 나는 당신의 아들들이 마지막 가시는 길 고운 옷을 입혀드리도록 조용히 물러나와 담배를 빼어 문다.
2.
"대학생 되니까 좀 어떠냐?"
스무 살이 되던 해의 추석, 외삼촌은 젓가락질 이야기에 이어 대학생활에 대한 물음을 불쑥 덧붙이셨다.
나의 외할아버지, 그러니까 외삼촌의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찍 세상을 등지셨다. 외할아버지는 6·25 이후 증평에서 큰 약국을 경영하고 계셨는데, 그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시자마자 외가의 가세는 급격하게 기울고 말았다.
당시 (아마 4·19 무렵이었을 것이다) 스물한 살의 외삼촌은 Y대 화공과에 다니고 있었다고 한다. 풀이 빳빳하게 다린 셔츠를 입고, 클래식 기타를 어루만지며 슈만의 트로이메라이에 가사를 붙여 흥얼거리던 멋쟁이 청년에게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은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모으던 엘리트 차남으로써, 속수무책으로 학적마저 버린 채 무너지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수습하는 심정이 어떠했을지 나로서는 감히 상상만 가능할 따름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당시 술과 연애, 당구로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학점과 흐리멍덩한 취기로 얼룩진 내 스무 살의 민낯을 감히 당신께 사실대로 말씀드릴 수는 없었다. 그저 그런 말들을 아무렇게나 주워섬기면서도, 속으로는 나에게 실망하실 만한 얘기는 죽어도 꺼내지 않으려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 뒤로 입대하기 전까지의 몇 년 동안은, 외삼촌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해지곤 했다.
-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목사님의 낮고 침착한 음성이 울려 퍼진다. 그렇지만 누구의 귀에도 제대로 가닿는 것 같지는 않다.
-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생명의 주인이시고 죽음의 정복자이시며 어려울 때에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 죽음의 현실 앞에서 슬퍼하고, 우는 이들을 위로하여 주시고 은총을 베풀어주옵소서.
가족들과 교인들의 간헐적인 훌쩍임이 여기저기서 작은 파도처럼 일어났다가는, 이내 납작하게 가라앉는다.
- 이제 우리가 슬픔을 딛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자신들을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에 맡기면서 영원한 희망을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개발독재와 고도성장기, 희망 없는 노동 속에서 일생을 끈질기게 버텨온 한 사나이가 이제 막 생을 마감하였다. 자비로운 신이 정말 계시다면 외삼촌의 영혼만은 꼭 보듬어 안고 달래주시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3.
증평의 선산, 외삼촌은 생전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버지의 곁에 가 온전히 묻혔다. 장지로 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날이 맑고 더웠다.
관이 꽤나 묵직했지만 그 안에 든 외삼촌의 몸은 새털같이 가벼워, 우리는 오로지 나무의 무게와만 씨름하면 되었다. 다행히도 이미 오래전에 죽어버린 목재란 슬픔도 기쁨도 느끼지 못하는 바보여서, 온통 부서지는 마음과 흘러내리는 눈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히 버텨주었다.
외삼촌의 몸을 고이 품은 관은 그와 함께 땅 속으로 자취를 감추는 순간까지, 다만 살아남은 이들에게 엄숙한 매장의 의식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되풀이하여 일깨워줄 뿐이었다.
나는 여전히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한다. 이따금 외삼촌의 얼굴을 떠올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