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의 넋 (1)
- 어느 못 이룬 꿈에 바치는 만가(挽歌)
1. 서곡
보름달 밝은 느지막한 저녁, 도시의 소란으로부터 고즈넉이 한 발 물러나 있는 잿빛 빌딩의 3층 어느 널찍한 방. 녹슨 문손잡이가 살짝 흔들리는가 싶더니 휙 돌아간다. 삐걱대는 금속성의 가느다란 소리가 길게 이어지다, 어느 순간 쿵 하며 낡은 여닫이문이 열린다. 곧이어 허름한 패딩 점퍼에 지퍼를 끝까지 올려 얼굴을 파묻은, 중키의 고수머리 청년이 들어와서는 조심스레 팔을 뒤로 돌려 문을 닫는다.
청년은 나지막이 콧노래를 흥얼대며 끼고 있던 검은 벙어리 털장갑을 가볍게 벗어던진다. 그러자 그 속에 있던 희고 얇은 면장갑 한 벌이 청년의 손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 여느 물건과는 달리 손가락마다 끝 마디 2-3센티씩이 잘려나가 있는데, 가위질 솜씨가 시원찮은지 삐뚤빼뚤한 테두리 사이로 터져 나온 실밥들이 허다하여 보기에 따라서는 퍽 우스꽝스럽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년은 이제 방 저편에 있는 무언가에 시선을 고정시키고는 장갑 째로 양손에 입김을 호호 불어 비벼대며 눈을 번뜩이는 중이다. 마음속에 집념이나 갈망을 담뿍 품은 사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모종의 세찬 기운을 밖으로 뿜어내기 마련인데, 청년의 경우에는 그것이 거의 손에 잡힐 정도로 강렬하다. 분주히 서성대는 잰걸음이나 이따금 경련하듯 뒤틀리는 어깨, 잔뜩 곤두선 뺨의 잔털들은 모두 청년의 끓는 가슴을 대변하고 있다.
5분 남짓 지났을까. 혹한에 얼었던 손이 어느 정도 녹아 더운 피가 돈다 싶었는지, 청년은 줄곧 눈길을 붙박아두던 방 한 켠으로 뚜벅뚜벅 향한다. 청년의 앞에는, 좁은 창 너머로 들어오는 달빛을 받아 검은 광택을 내비치는 두텁고 커다란 상자 비슷한 것이 놓여 있다. 종전까지 신열에 달뜬듯하던 청년의 몸가짐은 상자 쪽으로 다가갈수록 눈에 띄게 고요히 가라앉는다. 천천히 의자를 빼내 그 앞에 앉을 무렵엔, 비의(秘儀)를 행하는 어느 밀교의 사제와 같은 엄숙함마저 풍겨온다.
깊은 숨을 한 차례 머금었다 뱉은 청년은, 절도 있게 양팔을 활짝 벌려 상자 앞부분의 뚜껑을 열어젖힌다. 침침하던 방안이 일순 반짝이며, 길고 희끄무레한 뱀 같은 일련의 네모꼴들이 불쑥 나타난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얼룩말의 줄무늬처럼 비집고 내려오는 검은 조각들. 피아노다. 청년의 명치 께에 넘실대는 금빛 글자는 뵈젠도르퍼. 그랜드피아노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콘서트용만큼 길지는 않은 것으로 보아, 베이비그랜드 모델이다.
손끝에 와닿는 서늘한 감촉에 전율하며, 청년은 신중하게 더듬어 짚은 백건 하나를 깊숙이 누른다. 악기는 기다렸다는 듯이 즉시 그 요청에 응답한다. 탄력 있고 단단한 소리가 퍼져나가며 청년의 밤이 시작되었음을 주변에 알린다. 더러는 창문으로 휘돌아나가거나 방 안에 켜켜이 쌓인 먼지더미 위를 맴돌다 흩어져버리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다발들이 청년의 귀와 심장으로 파고들며 그의 혼을 뒤흔들어 깨운다. 청년의 턱이 홱 추켜올려지며, 청명한 단음(單音)은 곧 보드라운 화성으로, 보드라운 화성은 다시 양손의 충만한 가락으로 번져간다.
밤의 복판을 가르며 하얗게 빛나는 것은 오로지 건반과 청년의 장갑, 그리고 이따금 벌어진 입으로 미소 짓는 그의 얼굴뿐. 단정하게 첫 운을 뗀 청년은 이내 다소곳한 시냇물이 되어 노래하기 시작한다. 시냇물은 금세 본류의 물줄기로 합류하고, 큰 강이 되어 보다 넓고 낮은 곳을 향해 행진한다. 목덜미와 가슴팍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힐 무렵, 청년은 마침내 큰 파도가 되어 거리낌 없이 통곡하고 마음껏 절규하며, 크게 웃고 당차게 포효한다.
처음부터 청년의 손끝을 비추던 달에게는 이런 풍경이 낯설지 않다. 달은 초가을 무렵부터 그를 묵묵히 지켜봐 왔다. 만월(滿月)을 전후하여 그가 찾아올 때면 언제나 같았다. 밤이 여물어감에 따라 달빛은 청년의 손등을 떠나 팔꿈치와 어깨, 가슴과 목덜미, 콧잔등과 이마를 차례로 정성껏 어루만지다가는, 동녘이 밝아올 무렵 지쳐 잠든 그와 함께 아스라이 스러져가곤 하는 것이다.
또한, 달은 알고 있었다. 그 방에서 음악의 오래된 신비를 호흡하고 체현해 내는 존재는 비단 청년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연주에 심취한 청년의 숨결이 거칠어질 때, 달은 그 또 다른 존재에게 청년 몰래 눈짓했다. 스스로도 어쩌지 못할 거대한 힘에 붙들려 청년의 눈빛이 귀기를 띠며 형형해질 때, 달은 청년의 정수리 너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애태웠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 비밀의 존재는,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며 소리 없는 손짓으로 달을 달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