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여섯 달 전, 그러니까 작년 초여름 즈음하여 청년은 군 생활을 마쳤다. 전역 신고와 동시에 무언가 달갑지 못한 것이 외부로 배출되는 모양새로, 그렇게 청년은 자대로부터 사회로 내던져졌다. 대부분의 예비역 병장들이 그러하듯, 말출 무렵부터 제대 후까지 한동안 시달리고야 마는 병에 여지없이 걸린 채 - 멋대로 부푼 제 가슴에 용케 맞추어 온 세상이 돌아가 주리라는, 그 착각의 상사병.
그것은 결코 이루지 못할 기대였다. 상병 진급 즈음하여 쇠락의 빛을 띠던 청년의 터수는 그때쯤엔 이미 가망 없이 이울어 버려, 이른바 좋았던 한때란 현관을 박차고 전투모를 내던지며 기세 좋게 어머니께 거수경례를 올려붙이던 날로부터 채 달포를 이어가지 못했다.
결국 청년은 오래고 많은 추억이 깃든 XX산 어귀의 서른두 평짜리 아파트를 떠나게 되었다. 청년이 OO동 재래시장 언저리의 빌라촌 어느 구석, 십삼 평짜리 허름한 전셋집으로 옮겨 오던 날이었다. 유난히 부주의하여 이미 낡은 가재도구들에 계속 흠집을 보태며 나르던 또래의 이삿짐센터 인부가 있어, 청년은 그에게 조심 좀 하라며 냉담한 몇 마디를 쏴붙였다. 그런데 그 인부도 지지 않고 퉁명스레 맞받아버리는 바람에, 둘 간의 말싸움이 번져 분위기가 다소 험악해졌다. 그때 물끄러미 그 광경을 지켜보던 청년의 아버지가 불쑥 중재에 나섰다. 아버지는 청년에게 만 원짜리 몇 장을 쥐어주며 두 골목 너머에 철물점이 있으니 못과 형광등, 철사 등을 사 오라며 목록을 적어주고는 그의 등을 툭 쳤다. 인부를 잠시 노려보던 청년은 곧 그 말을 따라 길을 나섰다. 청년은 어렵지 않게 그 철물점을 찾았으나, 마침 주인이 출장 중이라는 메모에 곧장 발걸음을 되돌렸다.
그리고 집이 있는 골목 어귀로 다시 접어들 때, 청년은 보고야 말았다. 트렁크에서 나머지 작고 초라한 살림살이들을 꺼내 진저리치듯 어머니께 떠안기고는 홀로 낙향하는 봉고차에 올라타던 아버지의 모습을. 신경질적으로 차키를 돌려 시동을 걸다가 멀리서 걸어오는 청년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죄스러움이 가득한 얼굴을 애써 내리깔며 아무런 인사 없이 떠나버리던 그 비정한 눈빛을.
사방의 공사판에서 앙상한 골조 자재들이 조립되고 있는 새 동네의 황량한 풍경보다도, 그 주변에 즐비한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낡은 교회와 상가 건물들이 주는 삭막한 인상보다도, 단지 그 찰나의 눈빛이 청년으로 하여금 자신이 떨어진 처지를 분명히 깨닫도록 해주었다. 그 초점 없이 텅 비어 초라한 동공은 오래도록 잊지 못하리라고, 청년은 생각했다. 얼마 뒤, 대강의 일이 마무리되자 집의 안팎을 바삐 들락거리던 주인집 부부와 인부들도 모두 물러갔다. 덩그러니 남겨진 청년 모자(母子)의 첫날은 공연히 분주한 뒷정리로 시작하여, 종내는 잘 들지도 못하는 술에 무너져버린 어머니의 서러운 탄식으로 매듭지어졌다. 청년도 연거푸 많이 마셨으나, 취할 기분은 아니었다.
***
그 뒤의 두어 달은 청년의 마음에 크고 작은 상흔을 남기며 흘러갔다. 끝 모르도록 깊은 가난의 수렁을 들여다보고 있기란 많은 심신의 소모를 요하는 일이었다. 재물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거리의 전도자들의 섣부른 단정은 끓는점에 임박한 청년의 분노를 자극했다. 기름 발라 잘 빗어 넘긴 머리와 사치스레 요란한 넥타이를 연신 매만지며, 입으로만 쉽게 물질문명의 이기를 깎아내리는 화면 속 식자들의 주장 또한 청년의 허무를 아프게 할퀴었다.
그리하여 청년은 한동안 실로 모진 소외의 의식과 씨름하게 되었다. 묘한 일이었다. 고된 날품팔이를 마치고 돌아오며 버스 창유리로 날아와 부서지는 휘황한 도시의 야경을 마주할 때, 세계는 분명 금줄에 꿰인 보석처럼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고 아름답게만 보였다. 왁자한 대학가의 주점 거리를 걷는 풋풋한 연인들을 스쳐갈 때엔, 불행이란 말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색가들의 추상 속에나 겨우 남아있는 사어(死語)인 양 느껴졌다. 그러나 청년이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 때면, 같은 세상이 이번엔 그대로 준엄한 수갑과 차꼬로 변하여 어김없이 그의 마음을 옥죄고 짓눌러 오는 것이었다. 청년은 여름 내내 가위에 자주 눌렸다.
단기간 내에 딱히 손써볼 도리가 없는 불행, 그중에서도 특히 재물이 얽힌 액운과 맞닥뜨렸을 때, 뭇 청춘의 대응은 으레 다음의 둘로 나뉠 것이다. 하나는 당장의 벌이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자리에 뛰어들거나 훗날의 보다 나은 벌이를 위해 배우며 이력을 쌓는 구체적인 노력이다. 다른 하나는 자포자기하며 타인에게 분노와 원망을 집중하거나 속된 환락에 기대 위안을 찾는 씁쓸한 퇴행이다. 그러나 청년은 둘 중 어느 길로도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곧 세 번째의 길을 택하게 된다.
의식주 따위의 물질적인 문제들이 육신을 엄습할 때, 정신은 반대로 점점 명징해지며 깨어나는 부류의 사람들이 드물게 있다. 그리고 그들 중 더욱 드문 일부는, 막상 깨어난 정신을 가지고 눈앞의 문제들의 해결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서 멀리 떨어진 꿈과 가치들에 열렬히 몰두하는 비합리적인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청년은 그러한 기질을 타고난 인간이었다. 고통 속에 빠진다 하여 비상의 희망을 품지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지도 않는 인간. 어깻죽지에 화려한 한 쌍의 날개를 가질 수만 있다면 그에 만족하고 지저귀며 날아다닐 뿐인, 산금처럼 자유로운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