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 의식의 흐름
승마를 가기 전부터 내 마음엔 흥겨운 바람이 분다.
오늘은 더 진지하게 더 배움의 자세로 타보겠노라 비장한 결심을 한다.
결혼 전, 승마에 푹 빠져서 늦잠꾸러기인 나는 말 탈 생각에 새벽에도 눈을 번쩍 뜨곤 했었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자 나는 다시 말 위에 올랐다.
다그닥- 다그닥- 경쾌하게 달리는 말 위의 나는 구름 위에 앉은 신선이다.
한참을 실내 운동장을 달렸을까 말이 왼쪽으로 방향을 틀다 이내 무언가에 놀랜 듯
뒷발질을 연신 해댄다. 뻥…뻥!
“어…~어…!”
두번 째 발길질에 내 몸은 균형을 잃고 어느새 공중에 붕 뜨고 만다.
순간 눈앞이 깜깜해 진다.
칠흑 같은 어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나는 기억을 더듬는다.
‘어.. 일단 집에서 승마장 오는 길을 떠올려보자..’
집에서부터 차를 타고 운전을 시작하지만 길은 이내 중간에서 끊기고 만다.
‘다시 해보자.’
어느 구간을 지나자 내 앞에서 길이 또 끊기고 만다.
“정신이 좀 드세요..?”
순간 밝은 빛이 들어오고 내 앞에는 코치 두 명이 걱정스레 나를 바라보고 있다.
“네… 놀라셨죠? 죄송해요.”
나는 한참을 횡설수설하다가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누웠다. 정신이 좀처럼 차려지지 않는다. 휴대폰을 들어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제가 낙마해서 좀 다쳤어요.”
아빠의 놀란, 깊은 탄식이 이어졌다.
“심한 것은 아니고 허리로 떨어져서 등 쪽이 좀 다친 거 같아요. 병원을 가보려고요.”
남편에게도 소식을 전한다.
“응, 여보 나 병원 다녀와볼게. 응 바쁜데 어떻게 나오겠어.”
힘겹게 옷을 벗자 주변은 온통 낙마하며 내 몸에 박힌 흙으로 난리통이 된다.
‘거의 땅속에 파묻힐 뻔했나 본데…?’
목욕 후 차 키를 들고나와 운전을 시작한다.
‘이만한 게 참 다행이야. 너무 감사하다 살아있는 게. 다친 것도 다 뜻이 있을 거야.’
도착 한 정형외과 대기실, 점점 몸에 힘이 들어간다. 등은 식은땀으로 흥건하고 엉덩이부터 등줄기를 올라 목뒤까지 통증에 아찔해 진다. 몸에 힘이빠지며 자꾸 눈이 감겼다.
“엑스레이 상 골절은 없습니다. 대신 기억을 잃으셨으니 오늘 밤 집에 가서 구토나 어지럼증이 있는지 잘 살펴보시고 그럴 경우 바로 응급실로 가세요.”
처방전을 들고 약국으로 향한다.
“저 임테기도 하나 주세요.”
이 와중에 이걸 사는 내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난다.
분명 임신될 일은 없었는데 만에 하나 처방받을 약을 먹으면 잘못될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잘 몰랐는데 나 아직도 둘째를 원하나 보다.
병원 진료를 마치고 나오자 아이 하원 시간이 훌쩍 넘은걸 깨닫는다.
“여보, 미안한데 하원 여보가 시켜줄래?”
오자마자 확인 한 비임신 한줄이 뜬 임테기를 손이 붙들고 침대에 조심스레 몸을 눕힌다. 얼마 후 엄마에게서 페이스톡 전화가 걸려온다.
“네, 엄마. 몸은 괜찮아요. 뼈에 이상 없다니까 괜찮을 거 같아요.”
“그래.. 마음은 괜찮고…?”
“아… 마음…네..”
전화를 끊은 마음이 갑자기 먹먹해진다.
눈시울이 뜨겁다.
‘아.. 왜 허전한가 했는데… 내가 내 마음을 신경 써주지 못했네. 그것부터 물어봤어야 하는데…나 되게 놀라고 무서웠었어..’
갑자기 처음부터 마음껏 울지 못하고 내 상황을 축소해 알리기 급급했던 나 자신이 미련스럽게 느껴졌다. 이건 분명한 패턴이었다. 유학 생활 중에 아플 때도 끙끙 앓으며 엄마한텐 괜찮다고 연락했었다. 응급실은 항상 혼자 운전해서 가야 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나는 글쓰기 수업을 통해 내 마음을 살펴주는 법을 제대로 배운 여자였다. 누워서 움직이기 힘든 통증을 느끼며 눈물을 줄줄 흘렸지만 이런 나를 발견했다는 기쁨이 슬픔을 헤집고 들어왔다. 그래 나는 종종 아팠고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봐 아픈 만큼 아프다고 말하지 못했었다. 나는 나 스스로를 위로하기 전에 주변에 걱정을 끼치지 않는 게 우선이었다. 긍정의 지점이 있을까… 나는 나를 위로해주지는 못했지만 긍정이란 것을 방어기제로 썼다. 너무 힘들어 무너지고 싶을 때 나를 보호하려는 내 행동은 최대한 좋게 생각했다. 그래서 설령 내 마음을 돌봐주지 못했을지언정 나쁜 생각으로 나를 몰아붙이지도 않았었다.
한 손에는 비임신이 뜬 임테기를 들고 눈물을 줄줄 흘리는 내게 퇴근한 남편과 아이가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아파서 그래? 임신했어? 왜 그래?”
“…..”
“엄마 괜찮아? 내가 낫게 해 줄게~”
내가 오늘 병원에 누워있었다면 이 아이는 엄마 없는 아이가 되었겠지?
갑자기 정신이 좀 차려졌다.
오늘 밤이 고비랬다. 오늘 밤 어지러움이나 구토만 없으면 뇌 문제는 없는 거랬다. 타박상쯤이야 시간이 나으면 다 나을 수 있으리라.
몸의 통증이 더해질수록 정신은 더 또렷해진다. 오늘 일어났던 일을 계속 복기해 본다. 내가 느꼈던 감정들을 계속 다시 마주하며 유의미하게 흘려보내려고 애써본다.
어쨌든 나는 살아있다. 죽음과 삶 경계에 잠시 다녀왔단 생각이 드니 내가 그동안 크다고 여겼던 모든 것들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내가 살다 내일 죽으면 남들이 부러워할 직업 하나 가졌다고 행복했노라 말하지 않을 거 같다. 내가 살다 지금 당장 숨이 끊어진다면 내가 모아 온 돈이 그리울 거 같진 않다. 그래, 나는 내가 나눈 웃음들이 뿌듯할 거 같아. 내가 나누던 밝은 기운이 자랑스러울 거 같아. 내가 준 사랑이 크기만큼 훈장 같을 거 같아. 그런 마음이 들자 앞으로 내가 어떤 목적을 갖고 살아야 할지 선명하게 그려졌다. 좋은 기운을 흘려보내고 싶어. 지금 내가 그리는 만화가 한편당 4시간이 걸리지만 독자들은 그걸 1분도 안돼 다 읽지만 그 시간에 피식 한 번 했으면 좋겠다. 그 시간 안에 머리에 각인되어 그 사람이 정말 힘들 때 한번 꺼내볼 수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으면 좋겠어. 앞으로 내가 그릴 얘기들이 아주 좁은 구석이라도 비출 수 있게 해볼래.
그러려면 일단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
나는 근육이완제, 소염, 진통제를 꿀꺽 삼키고 비장하게 다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아직은 어두운 새벽, 새벽 6시다. 내가 이 시간에 내 정신으로 눈을 뜬 적이 있었던가? 잠을 다시 청해보려 해도 어젯밤까지 지끈거리던 뒤통수는 안정을 찾아 정신은 더 또렷해졌다. 살았다! 뇌에 문제는 없다는 확신이들자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서재로 갔다. 그리고 노트를 연다. 내 꿈을 매일 아침 100번씩 쓴다.
“나… 는… 책을 내는.. 작가가 된다. 이왕이면 베스트셀러이면 좋겠다. 이왕이면 돈도 많이 벌면.”
다시 삶의 기미가 보이자 시시하게 여겨졌던 것들도 하나씩 돌아온다. 살짝 나 자신이 웃기다.
그래도 나는 남들이 뭐라하던 내가 원하는 것들을 하나씩 쟁취하며 살아갈 거란 비장한 마음으로 무장한다.
아직 목 뒤부터 허리까지 움직이기 쉽진 않지만 나는 낑낑거리며 100번을 썼다.
시원하면서도 포근한 아침 공기가 콧 가로 맴돈다.
나는 분명 서른셋인데 마치 내 인생의 Day 1처럼 느껴진다.
어제는 내 인생 최고의 운수 좋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