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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찡 Oct 10. 2015

아는 맛의 스무디

#04.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이의 블렌딩

말을 듣지 않는 자녀들에게 "너, 지금 공부 안 하면 더울 땐 더운데서, 추울 땐 추운데서, 남들 다 쉴 땐 일한다!" 고 어깃장을 놓는 부모님이 있다면. 앞으로 제발 그런 말을 거두어주시길.


569돌을 맞는 한글날이다. 불타는 금요일이자, 자린고비 같았던 추석 연휴 이후에 맞는 꿀같은 연휴다.

자동 수신 메일에는 '한글날은 국경일이라, 근무하지 않는다.'는 안내를 써놓았다. 만끽하며 휴무를 즐기면 된다지? 그렇다면 직장인의 휴일에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방법에 대해 글을 써볼까?

천만에! 사실 '빨간 날'에 일을 하는 사람들은 상당 있다. 특히 유망직종이라고 하는 MICE의 현장 한 복판에서 나는 날짜 개념을 잊어가고 있다. 출근한지 열두 시간이 되어가는 때 퇴근하기 직전, 잠깐 이야기를 해볼까.


PCO Blender = Conventions

공부를 해 본 경험이 있다면, 공부에 투자한 시간만큼 조급해지는 느낌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됐어!'라는 느낌으로 시험을 마주하는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다. 사실 준비를  오래할수록, 더 열심히  할수록 결과에 대한 욕심을 내기 때문에 조급함과 두려움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이 경험은 사회생활을 통해서 더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적어도 행사를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그렇다.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안 보이던 오탈자가 행사 직전에 보인다던가, 수만 번 리허설을 해도 멀쩡했는데 막상 VIP가 실전에서 진행할 때 사고가 터진다던가 하는 상황은 믿고 싶진 않겠지만 꿈이라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나도 체크하고, 상사도 체크하고, 위원들도 모두 체크했는데 현장에서 터지는 사고는 '준비가 미흡했다'고 사과하기엔 참 억울하다.  주요 연사 중 한 명이 발표 날짜 닥친 자정이 되어서 e-mail로 본인의 개인 이슈때문에 한국에 올 수 없다고 한다면 그날 밤은 퇴근하기 글렀다. (현장 제작물, 인쇄 제작물, 홈페이지 모든 것을 다 바꿔야 한다. 연사 섭외를 그 새벽에 추가적으로 해야 할 때도 있다.)

PCO가 바쁜 이유는 '행사를 제대로 진행하기 위해서' 임을 명심해야 한다. 바튼 일정에도 제대로 행사를 굴러가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갈아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신경, 지끈거리는 두통, 막막한 한숨이 섞여 만든 스무디 같달까.


비상!  빛나는 전우애

행사 직전 일주일 정도는 사실 비상사태, 준전시 상황이다. PM의 완벽한 통솔력과 작전이 있다 하더라도  

전장에서 누구 하나는 부상을 입기 마련이다. 그것은 건강이 될 수도 있고 마음이 될 수도 있다.

여느 사회 초년생과 마찬가지로 나도 그 밸런스를 맞추기 어려웠다. 야속하게 말하는 누군가와 통화를 한다거나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결과물들을 보면서 화장실 문고리를 붙들고 많이 울었다. 맞출 수 없는 일정까지도 자기 멋대로 하길 원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을 조정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지만 풋내기 티가 역력한 나는 능청을 부리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나와 내 동료는 번갈아 가면서 그와 같은 상황을 함께 겪어냈고 하루는 내가, 또 하루는 동료가 훌쩍이고 흐느꼈다. 우리는 서로 다독이며 행사라는 절대 반지를 지켜내기 위해 많은 적들과 싸워야 했다.  

스스로가 입은 갑옷의 무게를 이겨내면서 싸우기까지 하려니 죽을 맛이었지만 노련하고 인간적인 상사분들과 함께 행사장에 있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력은 영어 기초반인데 현실은 미국 땅에 바로 떨어진 느낌을 매일 느끼며 살았다.

나는 나의 그 "초짜 티"가 정말 싫었다. 때수건이 있어 지울 수 있다면 가장 먼저 초짜 티부터 씻어내고 싶었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백전노장 같은 포스를 풍기려면 얼마나 많은 경험을 해야 할까.


아는 맛이 무섭다.

이제는 진부한 말이 됐지만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을 처음 한 사람을 만난다면 시원하게 욕을 해주고 싶다. 말이 되냐고. 어떻게 즐겨? 이 짜증나는 상황을. 그래도 평생을 잘난 맛에 살았잖아. 했다. '피할 수 없어서 즐기는 척'을.

매일 나에게 최면을 걸고 매일 연기했다. 그렇게 유월을 보냈다. 7월 행사가 끝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즐긴다는 게 고통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냥 그 과정을 감내하는 것 만으로도. 포기하지 않고 행사를 낳아보는 것도 즐긴다고 명명한다면 즐기는 게 되는 거였다. 지금은 안다. 끝나는 것이라고  다 끝은 있어서 그걸 견디면 된다고.

요즘 유행하는 구절 중에 '아는 맛이 무섭다'란 말이 있다. 초산보다 다음 출산을 감당하기 어려워 자녀계획을 마무리짓는 분들도 있댔다. 처음은 하지 두 번은 못한단 말도 자주 듣는다. 공통적으로 수반되는 고통의 양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괴로운 과정을 되풀이하는 것은 고타마 싯다르타의 격언처럼 "생(生)은 고(苦)"란 의미를 되새기는 나날들이다. 그럼에도 매일 주문을 외우다시피 하고 즐거운 척 연기를 하며 견디어내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기특하다.

하루 종일 휴일에 나와서도 일하는 나를. 이 지겨운 과정을 또 견뎌내고 있는 나를. 칭찬하려고 한다.

그런 의미로 시원한 스무디킹의 스무디라도 사서 마셔야겠다.


- 절대로 스무디가 마시고 싶어서 쓴 글이 아니다. 퇴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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