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맺어준 사이
2022년 7월 18일.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월요일 아침이었다. 카테리나 양이 메시지를 보내온 게 오전 9시 50분 경이었으니까. 적어도 49분까지는 그저 그런 평범한 오전이 맞았다.
그 시각에 나는 막 설거지를 끝내려던 참이었다. 싱크대 개수대 위로 어지럽게 튀어 오른 물기를 닦느라 마른행주를 움켜쥐고 있었는데. 갑자기 날아든 한 통의 메시지. 장문의 그것을 읽어 내려가는 몇 분 동안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모호한 기분이 내 손을 멈추게 했다. 간혹 그런 일은 있다. 내가 올린 이국적인 사진들이 퍽 마음에 든다며 SNS 광고를 제안하는 연락은 더러 있었다. 하지만 난 그런 목적으로 소셜미디어를 이용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그들에게 한 번도 답장을 보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광고도 협찬도 농담 따먹기도 아니다. 외국인이. 그것도 유창한 한국어로. 나의 독자가 되기를 자청해왔다.
그녀의 한국 이름은 '춘희'
나: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한국말을 정말 잘하시네요.
카테리나: 감사합니다.
저는 체스케 부데요비체에 살고 있는데요.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하고 싶어서
4년째 학원을 다니면서 배우고 있어요.
작가님 책을 꼭 읽어보고 싶은데
체코에서는 구할 수 없나요?
나: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소장하려고 들고 온 책이 있는데요.
첫 체코인 독자가 생긴 기념으로 선물로 드릴게요.
카테리나: 정말요? 고맙습니다.
그리고 저의 한국 이름은 춘희예요.
춘희라고 부르셔도 돼요. ^^
그리하여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세대도 다르고 국적도 다르지만 그런 건 중요치 않다는 걸 카테리나, 아니 춘희 양을 통해 확인했다. 나는 그녀와 약속한 대로 기꺼이 책을 선물했다. 체코에서 생활한 지 햇수로 2년째에 접어들었지만 현지 우체국에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 오는 국제 특송이라면 모를까. 체코 내에서 현지인과 소포를 주고받을 일이 생길 줄은.. 당연히 몰랐다. 춘희 양이 아니었다면 아마 한국에 돌아갈 때까지도 가져보지 못할 경험이리라. 나는 그녀에게 책을 주었고, 그녀는 나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물했다.
독자가 생기는 기분
책은 하루 만에 새로운 주인에게로 갔다. 오스트라바에 있는 나와 체스케 부데요비체에 사는 춘희 양. 우리는 약 290km. 그러니까 4시간 30분 만큼 떨어져 있다. 쉽게 볼 수 있는 거리가 아니기에 대화는 점점 더 애틋해졌다. 누구든 서로의 도시를 찾게 된다면 꼭 연락하자고. 이렇게 알게 된 것도 인연이니 얼굴 보며 밥이라도 한 끼 하자고.
그런 인사를 주고받는 동안 나도 모르게 목이 메었다. 독자가 생기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싶어서. 비단 춘희 양 뿐만이 아니다. 내 이름을 달고 나온 한 권의 책이 연결해 준 무수한 인연들. 그들이 건넨 따듯한 응원의 메시지. 그로 인해 올여름은 더없이 행복했다.
물론 책 한 권 냈다고 해서 인생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사람을 얻는다는 것. 그들 한 명 한 명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 글을 쓰지 않았다면 영영 겪어보지 못할 기적이니까. 위로와 공감이 빚어낸 무형의 산물. 그게 바로, 내가 일기가 아닌 에세이를 쓰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