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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수필 Nov 18. 2022

11월 18일, 첫눈이 내려요

또 다른 ‘처음’



체코에서 떠나 보낸, 어제의 계절



불과 하루 만이다. 어젯밤엔 보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았는데 오늘 아침엔 보송보송한 눈송이가 내린다. 어제의 계절과 오늘의 계절 사이에서 소리 없이 환승을 한다.



첫눈. 첫눈이 오고 있다



체코에서 맞는 두 번째 겨울이지만 올 겨울은 처음이니까. 이 눈은 처음이니까. 나는 또 무단히 설렌다. 오늘처럼 예고 없이 '처음'을 만난 날에는 어김없이 심장이 뛴다. 콩닥이는 마음에 가만히 손을 얹고 하늘을 본다. 쏟아지는 선물을 잠잠히 눈에 담는다. 그러다 문득 그날이 떠올랐다.


2019년 9월 30일. 그날은 월요일이었다. 아이를 출산하고 넉 달 만에 복귀한 현장은 라디오국이었는데 그날 오프닝으로 썼던 문장들이 눈송이가 되어 다시금 가슴에 파고든다.



첫사랑, 첫 키스, 첫 해외여행...
이런 단어들은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막 폴짝폴짝 뛰죠
그런데 두 번째 만남, 세 번째 키스,
네 번째 해외여행은 왜 쉽게 잊는 걸까요



그해 가을에 썼던 오프닝 원고의 서두는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 아이 엄마로서의 첫 출근. 그날의 복잡하고도 미묘했던 감정은 아무리 궁리를 해보아도 오롯이 설명할 길이 없다. 처음도 아닌데 처음인 것만 같았고, 낯설 게 전혀 없는데도 한없이 낯이 설었다.



익숙하거나 식상하거나



우리는 가끔 혹은 자주 익숙함과 식상함을 혼동하는 게 아닐까. 흔히들 입버릇처럼 말한다. 매일 쳇바퀴 같은 하루라고.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지루한 일상의 반복일 뿐이라고. 정말 그럴까. 어제는 모닝커피로 아메리카노를 마셨고, 오늘은 카푸치노에 시나몬가루와 흑설탕을 뿌렸다. 어제는 밤 산책 중에 낙엽 사진을 두어 장 찍었고, 오늘 아침엔 눈 내리는 하늘을 담아 SNS에 릴스를 하나 올렸다. 배경음악은 Ariana Grande의 <Santa Tell Me>.


똑같은 하루의 반복. 뻔해 보이는 일상의 연속이지만 그 속에는 무수한 우연과 또다른 처음이 보이지 않게 연결돼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기주 작가의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 행복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happiness'는 '행운' 또는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라는 뜻을 지닌 중세 영어 'hap'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그의 신작 산문집 <마음의 주인>을 통해 말했다. 행복은 수많은 우연과 우연이 그야말로 우연한 계기로 서로 포개지고 스며든 결과인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여기에 내멋대로 한 마디를 덧붙이자면, 모든 우연은 저마다의 이유로 ‘처음’일 수밖에 없다. 80억명의 지구인이 다 다르게 생겼듯이, 80년 인생의 어느 하루도 같은 하루는 있을 리 없다. 낙엽비가 내리거나 눈발이 흩날리는 이벤트가 없더라도 ‘오늘’은 ‘오늘’이라는 이유로 특별하니까. 삶은 그 자체로 귀중한 것이니까.




오늘의 계절에서 만난, 또 다른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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