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말쓰기
우리가 '글'을 써야 하는 이유는 뭘까.
1. 터 놓을 곳이 필요해서?
사람은 누구나 그렇다. 가까운 이들에게 조차 꺼내 보일 수 없는 속내가 있다. 그런 마음을 오래 묻어두고 살면 병이 된다. 품고 있기에 버거운 감정은 언제고 어디서고 끝내는 배설을 해야 개운하다. 그래야 육신이든 정신이든 건강하게 지킬 수 있다. 허나, 그렇다고 모든 이들이 글쓰기를 선택하진 않는다. 그럴 바엔 차라리 매운 닭발을 뜯으며 그 핑계로 눈물을 흘리는 편이 더 간편하니까.
2. 으스대고 싶어서?
별 볼 일 없는 줄 알았던 친구가 알고 보니 대단한 문장가다. 그 사실을 알기 전에나 알고 난 후에나 다를 게 없는 동일 인물인데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전과 같지 않다. 그러니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는 사랑받기 위함이 아닐까.
그런데 '나 글 좀 쓴다' 하는 이들이 가장 쉽게 범하는 오류가 미사여구다. '어때? 나 이런 글도 쓸 수 있어' 하며 우쭐대는 마음이 왜 없을까. 이왕이면 예쁘고 근사하게 치장하고 싶은 욕구. 더군다나 작가라면 응당 이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나 역시 그렇다. 글이란 모름지기 진정성을 담는 그릇이거늘 꾸밈에 치중하다 보면 그 사이, 진심은 훼손돼 있다. 독자에게 날것 그대로의 본질을 전하고 싶다면 화장은 걷어내고 민낯을 보이자. 그럴 수 있는 용기야말로 리스펙 받아 마땅하니까.
3. 말을 잘하고 싶어서?
글쎄. 이런 이유로 펜을 드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말을 잘하려고 글을 쓴다?! 엉터리 공식 같지만 감히 해답이라 말하고 싶다. 여기에서 '말을 잘한다'의 의미는 단순히 양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인간의 머릿속에는 무수한 생각들이 부유물처럼 둥둥 떠다닌다. 말이나 글로 꺼내 보이기 전까지는 정확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형체를 알기 힘들다. 그만큼 어지러운 상념의 바다에서 개중에 필요한 것들만 속속 건져내 조리 있게 풀어내는 능력. 이런 기능은 하루아침에 주어지지 않는다.
말하기도 기술이다. 기술을 익히려면 갈고닦는 연마의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누구나 말을 한다. 입으로도 말하고 눈으로도 말하고 손으로도 말한다. 하지만 말을 맛있게 하는 사람. 말로 감동을 주는 사람. 이런 화자는 흔치 않다.
몇 마디 말로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려면 무얼 해야 할까. 그런 욕구를 품은 이들에겐 글쓰기가 묘책일 수 있다. 말을 짜임새 있게 하려면 글을 써야 하고 글을 잘 쓰려면 생각이 깊어야 한다. 사색하고, 글로 쓰고, 말로 풀어내는 것. 15년 간 말글을 써 온 방송작가의 경험에 빗대면 이게 하나의 묶음이다.
글쓰기가 가져온
뜻밖의 효과
필자의 경우는 셋 다 해당된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말수가 적은 아이였다. 그래서 터 놓을 곳이 필요했고, 가진 재주가 글뿐이라 칭찬받고 싶어서 열심히 썼다. 신기한 건, 이 두 가지 이유로 글을 썼더니 말도 같이 늘었다.
어린 날에 나는 발표 시간이 몹시 공포스러웠다. 어떤 날에는 '선생님, 제발 제 이름은 부르지 마세요'를 주문처럼 외우느라 수업 내용이 뭔지도 모르고 종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수줍음이 많고 나서기를 꺼렸다.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지내고 싶은 조용한 학생이었다. 그 시절의 나를 아는 은사님들이나 동창생들이 지금의 내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방송이라는 매체를 동경해 신문방송학을 전공했지만 역시나 소극적인 성격 탓에 작가가 됐다. 작가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으니까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화려한 현장 안에 들어가 있긴 했어도 시청자 눈에는 띄지 않는다. 그야말로 그림자 같은 존재다. 그렇게 흘려보낸 세월이 15년이다. 청춘을 바쳐 대본을 써냈다.
그 시간 동안 카메라 앞에서 진행을 한 것도 아니고 글만 죽도록 썼을 뿐인데... 내 안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미천했던 언변이 조금씩 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말수가 늘었지?' '내가 언제부터 사람들 만나서 대화하는 걸 즐겼지?’ 이런 생각이 들 만큼, 이제는 글만큼이나 말을 사랑하게 됐다.
필력 좋은
달변가들이
많은 이유
직업 상 내 주위에는 달변가들이 많았다. 아나운서, 리포터, MC, 성우, 그리고 전문가 자격으로 방송에 출연했던 패널들까지. 세상에는 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오랫동안 그런 이들을 숱하게 만났고 그들에겐 어떤 특별함이 있는지 가까이에서 관찰했다. 내가 발견한 그들의 공통점은 단순히 '말'만 잘하는 게 아니란 사실이다. 말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자기 계발을 한다. 작가가 원고를 써준다고 해서 그 원고에만 의존하는 방송인은 드물다. 말을 잘하기 위해서는 아는 게 많아야 하므로 직업으로 말을 하는 이들에게 독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덕목이다. 물론, 모든 달변가들이 다독을 하는 건 아니다. 모든 달변가들이 글을 잘 쓰는 것도 아니다. 타고나길 언변이 뛰어나서 글의 도움 없이도 그럴듯한 입담을 뽐내는 이들도 있을 테니까.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의 깊이가 남다른 사람 치고 글을 멀리하는 걸 보지 못했다. 평소에 책이든 신문이든 활자를 많이 읽기 때문에 생각이 깊고, 사려가 깊기 때문에 말이 물 흐르듯 나온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달변을 만드는 게 아닐까. 실제로 말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이들 중에 작가로 활동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말과 글 사이
시소 타기
어려서는 '말보다 글이 편해요' 라는 말을 자주 했다. 요즘은 반대로 ‘글보다 말’이 편하다. 글이 더 편하다고 했던 시절에는 글 양이 많지 않았을뿐더러 그 깊이를 헤아리지 못했다. 그랬으니 그런 말이 쉽게 튀어나왔겠지만. 글은 쓰면 쓸수록 어렵다. 이 정도 했으면 내공이라는 것도 좀 생겨야 하는데 여전히 빈 모니터를 보고 있노라면 한숨부터 새어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편한 행위를 계속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안타깝게도 이건 선택의 문제를 넘어섰다.
'리더라면 자기 글은 자신이 쓸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누군가가 그 자리를 꿰차게 된다'는
생각이 확산되면서 글쓰기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다.
강원국 작가의 <대통령의 글쓰기> 중
비단 리더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 생각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머리로 떠올린 것들을 소실하지 않으려면 눈에 보이는 글로 담아야 하고, 그렇게 종이에 담긴 활자들은 말에 힘을 실어준다.
결론적으로, 개인의 가치를 중시하는 퍼스널 브랜딩 시대에 ‘글쓰기’ 아니, ‘말쓰기'는 어떻게든 넘어야 할 산이 되었다. 어차피 넘을 거라면 해가 저물기 전에 능선을 타자. 그래야 늦지 않게 내려와, 산 아래 주막에서 지는 노을을 안주 삼아 막걸리라도 한 잔 걸칠 수 있을 테니까.
*표지 그림
<마리 브로이니크의 초상 (1894)> by 구스타프 클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