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emie Sep 30. 2018

내 등에 닿는 포근한 당신의 온기

하와이, 더 모던 호놀룰루에서 평생 잊지 못할 달콤한 낮잠을!



바로 저 소파였다, 하와이에서의 이튿날 우리 부부에게 평생 잊지 못할 낮잠을 허락했던 곳은.


지금보다 더 젊었던 시절 나는, 해외여행을 할 때 다들 적응하느라 고생한다는 시차가 나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줄로만 알았다. 그때는 한국과 일곱 시간, 열 시간씩 밤낮이 바뀌도록 시차가 있는 나라들을 여행할 때에도 전혀 힘겨운 줄 모르고 밤을 낮처럼, 낮을 밤처럼 신나게 놀러 다닐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역시 나이가 들면서 체력이 점점 떨어지기 때문인지 몰라도 어느 순간부터 시차 적응에 영 자신이 없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특히 미국을 여행할 때 그랬던 것 같은데, 이 정도면 하루의 시작을 상쾌하게 한 것 같다 생각을 했던 날도 어김없이 특정 시간이 되면 정말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몰려왔던 거다. 말 그대로 미친 듯이 잠이 쏟아지는, 그래서 정말 다른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두어 시간 정도 세상과 내가 분리되는 것만 같이 몽롱해지는 마의 시간이 존재하는 것 (시차 적응을 온전히 하려면 이제는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필요한 것 같다).


여행을 할 때에도 이러한 마의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힘든 일일 수밖에 없는데 심지어 우리는 학회 차 하와이에 방문한 것이었다. 하와이 도착 첫날은 호텔 주변을 조금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었고 이날은 학회가 정식으로 시작되던 이튿날. 우리는 아침부터 충실히 세션에 참여하고 난 후, 여기저기 어슬렁거리며 뭘 먹나 고민하다가 결국 맥도널드에서 점심을 간단히 해결하였다. 그렇게 너무 빠르게 밥을 먹고 났더니 다음으로 들어가야 할 세션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래서, 우리, 방에 가서 좀 쉴까? 하는 생각으로 그 아찔한 마의 시간에 숙소로 잠깐 들어왔던 참이었던 거다.


우리가 하와이의 오아후에서 첫 4박을 했던 호텔은 와이키키 비치와는 접해있지 않지만 특유의 모던한 분위기로 신혼부부들에게도 인기가 좋은 더 모던 호놀룰루 The Modern Honolulu라는 곳이었다.



호텔 입구를 들어서면 서퍼들의 천국이라는 하와이 다운 요란한 장식이 먼저 반겨주는 곳. 로비 뒤편은 낮 동안엔 그냥 투숙객들의 휴식 공간으로 쓰이지만 밤엔 화려한 클럽으로 변신하는 비밀의 공간도 숨어있다.


도착 첫날, 웰컴 드링크와 시원한 물수건으로 리프레쉬한 후 배정받은 방으로 올라가려고 보니, 엘리베이터 옆에 놓인 트리 장식이 눈에 띄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때가 크리스마스를 약 1주일 앞둔 때여서 이 호텔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하와이 곳곳이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화려했다. 언제나 크리스마스라고 하면 하얀 눈과 어우러진, 무척 춥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그런 완연한 겨울의 풍경만이 떠오르는데, 이렇듯 난생처음 여름의 도시에서 느끼는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는 정말이지 색달랐다. 이토록 멋지게 땀냄새 가득한 크리스마스라니!



객실 내부도 소문처럼 훌륭했다. 하와이의 호텔들은 가격이 비싼 반면 조금 낡은 곳들이 많아서 객실 컨디션에 만족하는 경우가 드물다는데, 이 곳은 아주 깔끔한 화이트 인테리어로 모던하면서도 곳곳의 하와이다운 소품들로 개성까지 챙긴 듯.


아주 폭신했던 침대와, 때때로 까만 새들이 와서 쉬었다 가던 발코니의 공간. 우리는 15층으로 비교적 높은 층을 배정받았지만 가장 저렴한 객실을 예약했더니 뷰가 좋지는 않았다 (이 호텔도 객실만 잘 선택하면 멋진 오션뷰를 즐길 수도 있다!).


그리고 여유공간이 아주 충분해서 좋았던 세면대도 기억난다. 화장품과 각종 화장도구들을 잔뜩 늘어놓고 정말 편안하게 잘 사용했었지.


이 곳에서의 나날은 일만 아니었더라면 마치 남편과 함께하는 두 번째 신혼여행과도 같았다.


호텔에 들어와서, 나만큼이나 무척 피곤했던 남편은 어딘가에 누워 쉬고 싶어했다. 그런데 집에서도 그렇지만 어느 호텔에 가서도 나는 남편에게 몸을 깨끗하게 씻고 잠옷을 입은 상태가 아니면 절대 깨끗하게 정리된 침대 위로 올라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루를 마치고 깨끗한 침대에 깨끗한 몸을 뉘이는 행복을 방해받고 싶지 않기 때문.


이 날도 역시 나는 잠깐 쉬고 싶다는 남편이 침대에 눕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소파 있는데 왜? 소파에 누우면 되잖아!


12월이었지만 역시 밖은 더웠기 때문에 문을 꽁꽁 닫고 에어컨을 작동시킨 후 내가 호텔에 장식된 우쿨렐레를 가지고 노는 동안 남편은 소파에 몸을 뉘었다.


너도 이리와, 같이 눕자.


곧 이어진 달콤한 남편의 유혹. 가뜩이나 그 마의 시간에 점점 가까워져 잠이 마구 쏟아지려는 찰나, 당연하게도 나는 이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소파는 무척 작았기 때문에 함께 누우려면 몸을 아주 꼭 붙여야만 했다. 이미 구석으로 몸을 잔뜩 당긴 채 팔베개를 해주려고 앞으로 쑤욱 팔을 내밀고 있는 남편. 그의 배에 등을 대고 쏙 안겨 들어갔다. 


방 안은 성능 좋은 에어컨 덕에 딱 쾌적할 만큼만 시원했고, 솜털이 마르도록 딱 기분 좋을 만큼만 건조했다. 귓속으로 사그락 대는 공기의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이후 스케줄이 있었기에 너무 깊이 잠들면 안 되는 데에에에..... 하는 실 자락 같은 의식의 가닥이 아주 잠깐 나를 방해했었던가. 괴롭기보단 오히려 달콤했던 일말의 죄책감을 잠드는 순간까지도 내가 느꼈던가. 잘 모르겠다. 확실히 기억나는 건, 등을 타고 전해지던 정말이지 따뜻했던 남편의 온기. 조금은 추운 듯한 방 안에서 나를 온전히 감싸주던 따뜻했던 그 온기뿐. 오래도록 깨고 싶지 않은 잠, 벗어나고 싶지 않은 남편의 품이었다.


기껏 하와이까지 가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란 게 겨우 호텔 방에서 낮잠 잔 거라니. 내가 생각해도 우습다. 하지만 그때의 그 잠은, 한국과 스무 시간 가까이 시차가 나던 하와이에서, 마침 잠이 무척 쏟아지던 마의 시간에, 아주 마음에 들던 더 모던 호놀룰루 호텔 객실 안의, 작지만 포근했던 그 하얀 소파 위, 몹시도 따뜻했던 남편의 품 안에서만 가능했던, 그러니 이제는 언제 다시 느껴볼지 결코 알 수 없는 그런, 정말 말도 안 될 만큼 소중한 한잠이었다.


책임감 강한 남편 탓에 우리의 낮잠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꼭 들어가야 할 다음 세션을 놓치면 남편의 기분이 무척 상할 것을 알기에 남편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것은 잠이 들고 삼십여분 정도가 흘렀을 무렵.


공기가 점점 건조해져 콧속이 살짝 아픈가, 고개를 갸웃하며 잠을 깨던 나는 잘 말린 빨랫감처럼 한결 보송해졌고 잠들기 전과는 확실히 달라져 있음을 느꼈다. 나는 그때 그 짧았던 낮잠으로 남편과 나의 공기가 전보다 99.99% 정도는 더, 아주 잘 섞이었다고 믿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밤바다의 까만 파도가 조용히 입안에서 부서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