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두어야 할 사람 '소인'

염치의 수준이 품격을 만드는 이유

by 유지현

'역겹다....'

입에 담지 못할 욕처럼, 순간적인 구토처럼. 내 머릿속이 말했다. "역겹다."

숙성된 홍어의 찌릿한 냄새처럼, 그 말을 끝내 혼잣말로 뱉고 나니 구리면서도 묘하게 화한 시원함이 머릿속에 퍼졌다. 순간적인 분노 때문에 느낀 감정의 폭발일까 생각했지만, 불쾌했던 관계와 태도에 대한 숙성된 생각이 못내 상한 냄새를 풍긴 것이다.


선을 넘는 행동을 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사과를 모르고, 자신의 이익만을 계산하며, 반성과 성찰이 없으니, 행동은 반복되고 생각과 태도의 성숙은 없다. 타인의 험담은 기본이고, 상황을 면하기 위한 뻔한 거짓말과 비아냥으로 말싸움의 승리를 마치 성취처럼 자축한다.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선택 앞에서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이것이 나의 역겨움의 실체다. 명확하고 강한 표현이 금기처럼 느껴져 조심스러웠지만, 내 판단은 단호하다. 그동안 많은 관계에서 겪은 불쾌한 감정과 머릿속에 떠돌았던 생각들을 붙잡아 정리해 보니, 이제야 명확해졌다. 그것은 인간적 이해나 감정의 문제로 정리할 것이 아니라 윤리적 평가의 영역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관계 자체를 깊게 고민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관계에 대한 태도와 선택에 대한 고려를 한다. 상대방과의 관계의 좋고 나쁨에 대한 불안함. 어떻게 개선해야 하나 하는 고민보다는, 그 관계에 대한 나의 태도는 어떠한가, 그리고 관계의 모양에 따라 어떤 태도로 임할 것인가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특히, 직장생활에서 동료와의 관계는 사적인 사이와는 다른 설정이 필요하다. 직장인의 세계에서는 '친구'를 만든다는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정석이다. 그걸 몰랐던 어리숙한 시절에는 동료관계에 많은 감정과 정성을 실었다가, 마음의 온도차에 화들짝 당황하기도 했던 때가 있다. 드라마에서처럼 오랜 시간을 함께하면 동료애가 넘칠 것이라는 상상과는 다르게, 현실에서는 서로의 치부를 기억해 두었다가 무기로 사용하는 장면도 보게 된다.

직장이라는 아주 일상적인 공간. 쉽게 떠날 수 없고 매일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곳에서, 하루의 1/3을 동료들과 함께한다. 갈등은 대부분 사소한 말과 태도에서 시작된다. 작은 무례, 작은 회피, 작은 계산이 반복되면서 관계는 조금씩 닳아간다.


이런 직장생활 속에서 어떤 사람은 관계의 기술을 익힌다. 말로 빠져나가는 법, 유리한 해석을 취하는 법, 갈등에서 손해 보지 않는 법에 능숙하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관계의 매너를 익힌다. 사과할 줄 알고, 부끄러움을 알고, 자신의 책임을 돌아보며 관계 이후를 생각한다. 이 두 가지 태도는 각자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까.




나는 관계의 매너보다 관계의 기술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을 공자가 말한 '소인'에서 보았다.

공자는 사람을 능력이나 지위가 아니라 배움의 태도로 구분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아는 사람, 배워서 아는 사람, 곤란(실패, 좌절, 관계문제)을 통해 배우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을 가장 낮게 보았다. 이를 '소인'이라고 했다.


소인은 조화로운 관계를 만들기보다, 유리한 구도를 만드는 데 익숙하다.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진심의 화합이 아니라 상황에 맞춘 동조에 가깝다. 필요할 때는 비위를 맞추고, 이익이 사라지면 관계도 가볍게 접는다. 그래서 쉽게 무리를 짓고, 편을 가른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을 나누고, 그 경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관심하거나 무례해지기 쉽다. 강한 사람 앞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몸을 낮추고, 약하거나 이익이 되지 않는 사람 앞에서는 태도가 달라지는 모습도 이들의 특징이다.

공자는 특히 이런 소인과 거리를 두라고 했다. 그 곁에 오래 머물수록 사람이 닮아가기 때문이다. 말과 기준이 닮고, 결국 태도가 닮기 때문에, 배움과 성찰의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불리한 상황 앞에서 누구나 '소인'이 되는 순간이 있다. 지난날 '소인'이었던 어느 순간이 있었고, 언젠가 무기력 앞에 용기 있게 군자가 될 수 있을까는 미지수다.

그러나 '소인'이라는 감각을 아는 사람과 감각이 없는 사람은 다른 것 같다. 속된 말로 사람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이 이런 '소인'을 두고 하는 말일까.

사람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여기고, 관계에서 배움과 성찰의 태도가 없는 것이 일상인 소인에게는 설득과 설명이 필요 없다. 더욱이 관계 단절로 분노를 표현할 필요조차도 없다. 그저 '소인'에게 물들지 않도록 무관심과 거리 두기로 나를 보호하는 것을 선택하니, 불쾌하게 냄새나는 감정이 사라졌다. 그리고 편안하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윤리적 뼈대인 인의예지——인(仁)은 타인을 헤아리는 마음, 의(義)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기준, 예(禮)는 관계를 유지하는 형식과 태도, 지(智)는 판단의 지혜다.—— 이 네 가지가 삶 속에서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염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잘못을 알아도 부끄러움이 없으면 행동은 바뀌지 않고, 관계를 훼손해도 수치심이 없으면 반복은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염치가 사라진 자리에서는 인은 '듣기 좋은 수사'로, 의는 '계산'으로, 예는 '형식'으로, 지는 '궤변'으로 변질된다. 겉으로는 말이 번듯하고 논리는 그럴듯하지만, 그 안에는 스스로를 돌아보는 힘이 없다.

내가 어떤 태도 앞에서 역겨움을 느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누군가의 염치가 작동하지 않는 상태를 인식했을 때 생기는 윤리적 거부감이었다. 내가 선택한 거리 두기는, 내 안의 염치가 더 이상 분노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나는 요즘 이 '염치'라는 단어의 매력에 푹 빠져있다.

생활하는 모든 것에 이 염치를 적용해 본다.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남이 보기 전에 스스로 멈추게 만드는 마음.

관계에서, 대화에서, 공공장소에서, 나의 행동과 생각에서.

남이 볼 때의 내가 아니라, 내가 나를 염치로 점검해 본다.

관계의 태도는 이 염치의 수준과 적용 여부에 따라 그 품격이 달라질 것이다.




나에게는 '수요일의 친구'인 동료가 있다. 수요일마다 둘이서만 점심식사를 함께한다.

그날은 주로 좋은 책과 영화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거나, 뉴스나 경제와 관련한 정보를 주고받는다. 또 생활에서 느끼고 경험한 좋은 이야기로, 짧은 시간이지만 풍성한 마음으로 오후 업무를 시작한다.

남에 대한 관심은 삼가며, 우리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그 한 시간을 항상 기대하는 마음으로 맞이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다정한 말로 관계의 매너를 실천하며, 예의와 배려로 염치의 감각을 키우며, 배움을 자극하고 깨달음을 나누며 우아한 품격을 연습한다. 그렇게 조용히 서로를 응원하며, 위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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