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을 읽고, 생각하지 않기로 한 대중의 선택에 대하여
『동물농장』은 혁명으로 시작한다. 인간 농장주의 착취에 맞서 동물들은 봉기하고,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는 선언 아래 새로운 공동체를 세운다. 이 장면은 단순한 우화가 아니다. 러시아 혁명 이후, 해방의 언어가 어떻게 다시 지배의 언어로 변질되었는지를 압축한 역사적 은유다.
오웰은 동물을 착취했던 인간을 몰아낸 이후의 세계를 그린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주목한 것은 폭군의 존재가 아니라, 폭군이 다시 등장할 수 있는 구조였다.
시간이 흐르며 동물 농장의 규칙은 조금씩 바뀐다. 처음 농장의 원칙은 단순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며, 누구도 다른 동물을 지배하지 않는다. 인간의 침대에서 자지 말 것, 술을 마시지 말 것, 동물을 해치지 말 것과 같은 규칙들은 혁명의 윤리를 구체적인 문장으로 고정해 두는 장치였다.
그러나 생각하고 말하는 역할이 돼지들에게 집중되면서, 규칙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수정된다. 단어 하나가 덧붙여지고, 문장은 해석을 달리하며, 변화는 늘 ‘불가피한 조정’으로 설명된다.
민주적 토론과 미래를 설계하던 스노볼은 나폴레옹의 계략에 의해 축출된다. 나폴레옹은 인간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두려움을 앞세워, 질서와 안정을 명분으로 삼아 권력을 독점했다. 스퀼러는 모든 변화 과정을 “원래 그랬다”는 말로 포장했다. 혁명은 끝났지만, 평등은 시작되지 않았다.
책을 읽는 내내, 나폴레옹과 스퀼러가 대중을 속이고 모든 것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조리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스노볼이 어디선가 다시 나타나 대중을 이끌어 주기를 은근히 기대했다.
거짓을 정교하게 포장하고, 대중의 불안을 관리하며, 언어로 현실을 재구성하는 스퀼러의 모습은 너무도 익숙했다. 현대 사회에서도 많이 보아온 행태여서 그들에 대한 답답함과 분노가 함께 일었다. 그러나 나를 더 괴롭힌 것은 스퀼러가 아니라 복서와 벤자민, 그리고 끝없이 같은 말을 외우는 양들이었다. 그들은 악인이 아니었다. 성실했고, 충직했고, ‘착한’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권력은 누구에게 있었는가 보다, 왜 그 권력이 가능했는가를 묻게 되는 지점이다.
파레토의 엘리트 이론이 있다. 모든 사회에는 언제나 자연스럽게 중심이 되는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정보에 먼저 접근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이들이 늘 등장한다. 문제는 엘리트 집단의 존재가 아니라, 그들에게 주어진 힘을 사회에 어떻게 적용하는가 이다.
스노볼처럼 사회 전체를 위해 민주적 과정을 통해 미래를 설계할 것인가, 나폴레옹처럼 소수의 이익을 위해 대중의 희생을 강제할 것인가. 『동물농장』의 비극의 구조는 돼지들이 엘리트가 된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 엘리트의 선택을 묻고 견제할 힘이 대중에게서 사라졌다는 데 있었다.
나폴레옹은 독선적 지도자의 역할, 스퀼러는 괴변과 궤변으로 사실을 재구성하는 언어의 역할, 개들은 공포를 동반한 집행의 역할, 양들은 반복되는 구호로 사유를 대체하는 동원의 역할, 벤자민은 알고도 말하지 않는 침묵하는 이성, 복서는 “열심히 하면 된다”는 믿음으로 체제를 떠받치다 소모되는 시민의 역할을 상징한다.
동물들의 신뢰의 상징이었던 복서가 체제에 헌신만 하다가 다쳐서 쓸모가 없어졌을 때,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장면에서는 울분이 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렇게 살다 간 복서에게, 복서처럼 선량하고 성실하기 만한 나와 같은 대중에게 화가 났다. 우리는 왜 그런 시대를 허용하는가.
복서는 끝까지 생각하지 않겠다는 헌신을 선택했고, 벤자민은 말하지 않겠다는 안전을 택했으며, 양들은 사고 대신 반복을 택했다. 생각할 수 있었음에도 생각하지 않기로 한 선택, 말할 수 있었음에도 침묵을 택한 태도에 대한 분노였다.
대중은 언제나 더 옳아 보이는 쪽이 아니라, 지금 당장 불안을 덜어주는 쪽을 선택해 왔다. 그리고 엘리트에게 생각을 맡기는 편안함에 익숙해졌고, 그 결정에 따랐다. 『동물농장』에서 순종하지 않은 소수가 제거되는 장면은, 폭력 그 자체보다도 이 선택의 방향을 드러낸다. 생각을 대신해 주겠다는 권력과,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맞물릴 때, 대중은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선택의 범위를 잃어간다.
『동물농장』에서는 스노볼은 끝내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 결국 농장은 혁명 이전의 사회로 되돌아간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권력에 의해 재구성되며 변질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억을 지키는 마지막 흔적이 있었다. 동물들은 여전히 노래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상과 해방, 연대를 노래한 〈영국의 동물들〉이다. 이 노래는 왜 혁명이 시작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착취와 불평등이 일상이었던 시절의 기억, 더 나은 질서를 바랐던 감정이 그 노래 속에 남아 있었다. 언젠가 다시, 동물들이 지금의 삶을 의심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면, 이 노래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책을 덮으며, 그때는 나폴레옹이 아니라 스노볼이 선택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건네본다.
그렇다면, 대중은 어떤 조건에서 다시 스노볼과 같은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을까. 『동물농장』이 현재에도 공감이 되는 이유는, 권력이 만들어지는 방식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능력과 비전을 갖춘 지도자를 알아보고, 그들이 권력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묻고 지켜보는 대중. 이 우화는 그런 대중이 부재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생각하는 일은 늘 피로를 동반한다. 때로 생각을 말하는 것이 용기가 필요할 때도 있다. 질문은 불편함을 부르고, 비판적 언어는 공격을 받고 고립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경우, 사람들은 생각하는 일을 누군가에게 맡기고 그 결정에 따르기를 선택한다. 『동물농장』에서 복서가 헌신을 선택하고, 벤자민이 침묵을 택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대중을 지키는 힘은 깨어 있으려는 개인들의 축적된 태도에서 만들어진다. 생각하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역사를 기억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대중이 스스로를 보호하는 최소한의 방식이다.
완전한 평등 사회는 끝내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평등을 당연한 질서로 받아들이는 사회 역시 정당하지 않다. 생각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 나의 무지를 외면하지 않겠다는 태도. 그것이 거대한 변화를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저항이자, 불평등 속에서도 평등을 지켜내려는 개인의 책임이라고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