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길이 되는 마을, 평화를 걷다

파주마정리 지역문화예술프로젝트_인구소멸지역, 평화의 산책길이 되다

by 유지현

'길'에서 시작되는 산책과 여행


산책을 하면 마음이 풀리고, 일상에 갇혀 있던 생각들이 한 걸음씩 열린다.

매일 같은 길을 걸어도 풍경은 새롭고, 새로운 생각이 피어난다. 한 발씩, 마음의 여유를 따라 내딛는 발걸음은 생각을 여는 의식이 된다.


여행도 산책과 같다.

걷는 길에서 독특한 풍경과 이야기를 만나면, 신선한 자극과 새로운 경험으로 행복감이 커진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할 때, 가장 먼저 '길'에서 여행의 첫 느낌을 받는다.


통영과 부산의 벽화 마을, 서울의 도보 여행 코스처럼 잘 다듬어진 산책길을 걷다보면, 그 지역이 품은 이야기가 마음으로 전해오는 듯 하다.

통영 동피랑은 철거 위기의 달동네였고, 부산 감천문화마을은 한국전쟁 피란민 정착촌이었다. 시민과 예술인들이 함께 벽화를 그리고 마을을 단장해, 낡은집과 가파른 골목이 세계적인 관광 브랜드가 되었다. 낡은 마을을 예술로 되살린 것이다.


길을 걸으면, 담장의 벽화와 오래된 상점들, 그리고 그 길을 단장한 많은 손길과 마음들이 다정하게 느껴진다. 주민의 삶을 담은 벽화로 그 지역의 서사를 공감하고, 자연을 벗삼은 도심의 성곽길을 걸을 땐 역사를 몸으로 체감한다.

산책이 곧 여행이 되고, 여행이 산책처럼 느껴지는 지점이다.


분단과 평화가 공존하는 마정리, 예술로 피어나다.


최근 나는 파주 마정리 지역문화예술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마정리는 군사 접경지역이자, 고령화와 인구 소멸의 그늘이 드리운 마을이다.

이날 어르신들의 장수 사진을 찍고, 삶의 이야기를 듣고, 벽화를 그렸다.


이 프로젝트는 단발성 행사가 아니라 예술가, 연구자, 교육자, 명상가 등 다양한 이들이 협력해, 장기적으로 문화 재생 모델을 만드는 작업이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애니쿤 작가님이 만든 캐릭터 '마정이'를 시작으로, 예술가들의 손길과 주민들과의 소통이 어우러져 새로운 문화와 여행길이 열릴 것으로 기대된다.


나는 예술가도 아니고 특별한 재주도 없지만, 우연히 참여하게 되어 그 초심에 함께했다는 뿌듯함을 느꼈다.

생전 처음 다양한 예술가들과 한 공간에서 호흡하며, 낯선 이들과 예술 활동을 함께 한 경험은 그 자체로 흥미로웠다.(참고로, 관심만 있다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마정 1리는 '말우물 마을'로, 마정리 전체를 대표한다. "옛날, 우물에서 힘찬 말이 솟아올라 마을이 번성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임진강과 민통선, DMZ가 맞닿은 이 마을은 임진각과 자유의 다리 같은 분단 유산과 평화누리공원, 평화 곤돌라 같은 평화의 상징이 공존한다.


분단과 평화가 함께 숨 쉬는 곳에서의 예술 활동은 단순한 미화 작업을 넘어, 분단과 평화가 교차하는 현장을 예술로 증언하고 치유하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은비샘의 노래, 꿈을 지키며 피워낸 삶


마을 주민들의 삶을 들으며 만난 이들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은 은비샘(가수 김도경)이었다

평화누리예술단원이자 노래 강사인 그는 66세로 이 지역에서 가장 젊은 축에 속한다. 은비샘의 작업실에 초대받아 미니 콘서트를 즐기고, 함께 마을을 산책하며 곳곳을 소개받았다.


하늘하늘한 빨간 스커트바지에 반짝이는 검은 티셔츠, 검은 중절모 차림으로 그만의 작은 무대를 만들었다. 색소폰과 피아노 연주, 감성 깊은 노래를 하나하나 선물하듯 들려주었다.


밝고 생동감 넘치는 모습, 맛깔난 입담. 이 마을에 시집와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 고지식한 지역 사회에서 예술인으로 꿈을 펼친 이야기, 매일 아침 남편을 배웅하고 시어머니를 돌보며 노래하고 퍼포먼스를 하는 그의 삶은, 도시의 어느 젊은이처럼 꿈을 지키며 피워낸 삶의 현장 같았다.


마을 길에서 거리낌 없이 춤을 추는 그의 모습은, 이곳이 군사 접경지역이자 인구소멸 위기의 마을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게 할 만큼 생동감이 넘쳤다.


희망을 노래한다는 게 이런 것일까.

은비샘은 자신의 인생을 살았을 뿐이지만, 그 모습은 사라져 가는 마을에서 사계절 피는 꽃처럼, 잊히지 않을 삶의 흔적이며 생명력이었다.


예술이 잇는 평화의 산책길


삶의 무게를 예술로 승화시킨 힘.
개인의 예술은 고단한 현실을 기쁨과 희망으로 바꾸었다.

어르신들의 옛이야기와 삶의 흔적은 기록으로 남아 공동체의 기억이 되고, 벽화는 낡은 마을에 새 숨결을 불어넣어 사람들의 발걸음을 이끌 것이다.


분단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때로는 공포로 다가오지만, 예술은 그 속에서 평온과 평화의 가치를 새기게 한다.


새롭게 단장된 이 마을의 산책길을 걸을 때 우리는, 분단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살아내고 웃으며 함께했던 사람들의 삶을 떠올릴 것이다. 온화한 바람과 포근한 마을길, 정겹게 맞아주는 나무들과 마주하며, 평화가 주는 감사함도 깊이 느끼게 될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기억하게 될 것은 이 땅이 간직한 이야기, 사람들의 목소리, 그리고 그것을 되살려낸 예술의 힘일 것이다.




이 마을을 다녀간 한 외국인이 왈츠 곡을 선물했다고 한다.

그 곡이 마정리의 벽화와 어우러진다면, 훗날 내가 여행자로 이곳을 걷게 될 때. 은비샘의 삶과 노래를 떠올리며 왈츠 스텝을 밟을지도 모른다. 산책이 일상을 깨우듯, 여행이 마음을 흔들듯이 말이다.


마정리 문화예술프로젝트에 함께한 수많은 손길과 마음으로, 이 산책길이 더욱 풍성해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