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새로운 인터페이스로써의 VR

변형가능한 공간, 연기하는 관객, 연결된 가상

by 최민혁

가상현실이라는 컴퓨팅 환경 속에서 ‘영화’의 경험은 어떻게 진화되어갈 것인가. VR 안에서는, 영화와 관객의 경계면이었던 ‘스크린’이 사라지며 관객은 영화의 내부에 현존(presence)하게 된다. 회화나 영화의 스크린 너머에 존재하던 가상의 공간이 이제는 관객이 서 있는 곳을 에워싸는 것이다. 가상을 재현하는 '창문’은 존재하지 않으며, 관객은 고개를 돌려 360도를 둘러볼 수 있게 된다. 이제 ‘프레임’은 영화 창작자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관객이 주도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되며, VR시스템은 그러한 관객의 움직임에 맞춰서 변화하는 원근법 이미지를 제공한다. 나아가 관객은 가상 환경 내에서 손으로 물건을 만지거나 걸어다닐 수도 있다. 사물이나 환경, 그리고 캐릭터와 상호작용이 가능해진다. 이렇듯 VR은 영화 관람의 인터페이스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VR 영화의 관객에게 ‘영화를 보는 경험’은 스크린 너머의 세계를 하나의 현실이라고 믿고 극중 인물에게 동일시하는 일과 다르다. 그대신, 서사가 흐르고 있는 공간의 한복판에 서서 자신의 주변세계을 관찰하고, 그곳에 살고 있는 인물과 눈을 마주치며, 그들의 이야기에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된다. 하지만 영화가 리얼리티를 구축하는 문법을 모두 허물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영화 매체의 경험 요소 중 어떤것들은 VR 매체와 충돌하거나 사라지지만, 어떤 요소들은 VR 안에서 재매개 되고 재발명된다.


첫째, ‘공간’은 “관객의 욕망에 따라 항상 새롭게 변형될 수 있는”(박영욱) 공간이 된다. 시점이나 움직임에 따라 실시간으로 다르게 체험되고, 3차원적인 탐험이 가능한 공간이자, 보는 나를 중심으로 변형되는 즉 주관적인 세계 체험이 용이한 공간이 된다. 즉 영화의 배경이자 무대였던 공간은 상호작용에 따라 변형가능한 동적 공간이 되는 것이다.


둘째, 관객은 어떤 종류이든 가상 세계 속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감각을 체험하게 된다. 희미한 정체성을 가진 ‘유령’같은 존재일수도 있지만, 마치 배우처럼 역할을 부여받아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해 서사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캐릭터들과 관계를 맺을 수도 있게 된다. 이는 무대와 관객의 경계가 무너진 환경 속에서 관객 스스로 신체를 움직이며 이야기에 참여하는 이머시브 연극과 비슷하다. 6축의 자유도(6 degrees of freedon)를 지원하는 HMD, 그리고 손과 발 등 신체 곳곳을 트랙킹해서 체화된 현존감을 구현하는 트랙킹 기술, 그리고 Volumetric 실사 영상 구현 기술의 발전은 관객 자신의 몸을 관람의 인터페이스로 만드는 일이다. 관객은 이제 객석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인터페이스'가 되어 가상과 현실의 경계면을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창조적인 주체가 되는 것이다. 내러티브와 상호작용의 진정한 만남은 바로 여기에서 일어난다.


셋째, 나아가 이러한 ‘연기하는’ 관객들은 VR 환경 안에서 실시간으로 다른 관객과 연결될 수도 있다. 서사적인 역할과 정체성을 품고 다른 관객들과 함께 서사 속에 현존하는 가상 경험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2인용 영화’(Cinematic VR Experience for Two Audiences) <나인VR : Come see me>(2018)는 동시에 접속해 있는 두 명의 관객이 느끼는 사회적 현존감(Social Presence)와 영화적 내러티브를 결합하려는 시도이다. 이 작품에서 관객은 다른 관객과 동시에 연결되어 시간여행의 이야기 세계 속에 함께 현존하게 된다. 그리고, 각자에게 주어진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클라이막스에서 서로 조우하게 된다.


주인공의 20년 전인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의 이야기에 각각 참여하는 두 명의 관객은, 같은 방의 서로 다른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을 모른채로 출발한다. 한명의 관객은 깊은 우울 속에 빠진 과거 속 주인공의 심정을 탐색하고 그가 자살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빠져 든다. 동시에 20년 뒤의 시간 속을 살고 있는 주인공은 갑자기 자신의 가족과 성공한 예술가로서의 일상이 모두 사라지는 이상한 현실을 경험하게 된다. 그 관객은 “현재의 나”라는 역할을 해 나가면서, 자신의 일상이 왜 파괴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갖고 과거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간다.


그런데, “현재의 나”가 과거의 자신을 기억해 낼 때 그 형상은 실제로 과거 관객의 아바타가 움직이는 모습의 반영이다. 그리고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절망스런 상황 속 “과거의 나”에게 미래로부터 찾아오는 “현재의 나”는 실제 다른 관객의 아바타가 움직이는 형상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상대 관객에게 연기하는 배우와 같은 존재가 된다. 두 관객에게 배역이 주어지거나 직접적인 소통 기능이 제공되진 않지만, 이야기 세계 속에서 서로 다른 정체성과 비대칭적인 역할로 ‘만남'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공유된 가상세계 안에서의 동시 현존은 영화적 경험을 위한 또 하나의 새로운 인터페이스가 될 수 있다. 말하자면 네트워크로 참여하는 연극 혹은 ‘멀티유저 VR 영화(Multi-User Cinematic VR)'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관객이 영화 안에 들어가고, 그곳에서 연기하고, 다른 관객과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이 개척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VR의 특성과 영화적 경험이 어떻게 만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창작자들의 일은 서사 속 관객의 정체성과 역할을 디자인하는 것이 되고, 관객은 ‘연기’라는 창조적이고 참여적인 형식을 통해 새로운 ‘연결된 영화’를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디지털 서사는 단지 스토리를 감상하기보다는 그것을 직접 연기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이야기가 가진 잠재적 능력에 또 하나의 강력한 요소를 추가해 준다.”(자넷 머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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