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무대로써의 VR 공간의 특성에 관해
가상 세계를 향한 ‘창문’을 바라보는 대신, 나는 지금 창문 너머의 가상 ‘공간’ 안에 들어와 있다. 가상현실에 진입하는 순간, 나와 이야기 속 세계의 경계면이었던 ‘스크린’은 사라지고, 나는 이제 이야기 세계의 내부에 있게(presence) 된다. 그런데 이 때 내가 서 있는 곳은, 창문 너머로 바라보던 곳과 같은 성질의 공간 일까.
#만들어지고 있는 공간
Oculus Story Studio의 <디어 안젤리카(2017)>를 보면,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에 맞춰 ‘조성되어가는 무대'가 관객을 실시간으로 감싸는, 다른 매체에서는 불가능한 체험을 하게 된다. 텅빈 어둠에서 시작하여, 허공에 드로잉 되는 선들이 캐릭터를 드리우고 씬을 채색한다. 배우였던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주인공의 독백은 공간을 그리움의 캔버스로 활용한다. 그녀의 목소리와 회상의 전개를 따라 관객은 공간을 둘러보고 그녀의 감정에 몰입 한다. 현실적인 움직임을 모사하는 캐릭터 애니메이션 대신, 장면을 그리는 ‘과정’이 바로 애니메이션이 된다.
<디어 안젤리카>의 공간은 영화가 그러하듯 필름 위에 저장된 객관적 세계가 아니다. 내가 이야기에 진입하는 순간 비로소 조성되는 ‘과정의 공간’이다. 따라서 관객은 이미 재현되어 있는 가상 세계로 접속해 그곳을 관음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만들어지고 있는 공간’ 혹은 아직은 덜 만들어진 채, 관객의 참여와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고, ‘관객의 도착’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공간으로 초대 받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움의 시뮬레이션
이러한 VR의 공간은 ‘불완전한 리얼리티’인 기억을 소환하는 내러티브와 잘 어울린다. ‘과정의 공간’을 스타일로 삼는 것이 아닐지라도 VR 스토리텔링 초기부터 <Pearl>(2016)나 <Vestige>(2018), <기억의 재구성>(2017) 같이 기억의 공간을 다룬 작품들이 많이 시도 되었다. VR이 관객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변형되는 주관적인 세계 체험의 공간이라고 한다면, 꿈이나 기억의 공간을 무대로 설정하고 그 특유의 감각을 법칙으로 삼아 이야기를 펼치기에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올해 선댄스영화제 New Frontier와 트라이베카영화제 Virtual Arcade 상영작인 <Book of Distance>(2020) 는 기억을 소환하는 공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기억을 위한 새로운 ‘공간적 인터페이스’들을 제안한다. ‘의식의 흐름기법’에 빗댄다면 아마 ‘기억의 흐름기법’ 내지는 ‘기억의 감각에 따른 상호작용 기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화자는 1930년대에 일본에서 캐나다로 이주해 인종차별과 전쟁의 상처를 겪어야 했던 할아버지의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들로 이루어진 ‘방’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화자는 시간의 거리와 지리적 거리를 넘나들며 잃어버린 감정을 소환하는 일종의 소환술사가 되어 가족의 사적 ‘기억’을 시뮬레이션 한다. 영화였다면, 기억하는 인물의 감정과 그가 기억하는 씬 사이를 직접 플래시백을 통해 교차하며, 기억의 공간과 현실의 감정을 편집으로 직조 할테지만, VR은 기억을 주체로부터 확장된 현실로써 공간에 흩뿌리는 것이다.
#인터페이스로써의 공간
VR에서 효과적인 공간 표현의 방식들을 떠올려보면, <Giant>(2016)나 <진격의 아빠>(2019)처럼 ‘공간 너머의 공간’이나 ’공간 속의 공간'을 만드는 구성적 접근이 있고, 유령처럼 공간을 떠다니며 유영하는 <7 Lives>(2019)나 <Bodyless>(2019) 같은 작품도 있고, 이야기의 무대를 인형의 집 같은 공간으로 축소시켜 관객을 ‘거인’으로 만드는 Penrose Studio의 전략, 재기발랄한 공간의 트랜지션을 스타일로 삼는 <Future Dreaming>(2019), 질료를 최소화하고 청각적인 연출을 통해 주인공의 공간적 상상에 동일시하게 만드는 <Dispatch>(2018), 공간 안에 다양한 시공간을 배치하는 접근 등 다양한 연출적 시도들이 존재해 왔다.
그런데 이러한 VR영화의 공간들을 탐구할수록, 기존의 연극이나 영화 매체가 자신만의 리얼리티를 구축하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과는 다른, 다른 종류의 ‘리얼리티’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처음 VR영화 작업을 시작하던 시기부터 이러한 리얼리티의 감각에 대해 생각할 수 밖에 없었는데, 대부분의 중요한 장면은 정면을 중심으로 펼쳐질 때 조차 나는 어떻게 몰입감을 느끼는 것일까. 혹시 고개를 돌려볼 수 있다는 가능성 만으로도 새로운 종류의 매체적 태도를 갖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360도 곳곳에 시각적 정보가 실제로 배치되어 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신체가 참여하고 있다는 감각, 그리고 나의 움직임에 따라 시점을 선택할 수 있다는 어떤 잠재된 가능성과 느낌 때문에 이미 ‘공간성’을 예비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는 혹시 마샤 킨더가 이야기하는 디지털 미디어의 관람객 - “주어진 내러티브 혹은 이미지 구성의 조작 가능성을 개성대로 선택, 변형하고 이를 인풋함으로서 자신의 경험에 기반해, 자신만의 텍스트를 아웃풋해 내는, 상호유기적인 관계를 맺는”(인원근) - 관객과 비슷한 것은 아닐까. 즉, 실시간으로 프레이밍을 결정하는 관객의 이동성과 신체의 참여는 이미 현존감을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신체’의 상태를 형성하기 때문에, 공간의 사실적이고 충실한 재현 보다 중요한 것은 관객이 공간과 어떠한 관계를 맺느냐이고, 그러한 인터페이스가 어떻게 제시되고 있느냐에 따라 나름의 미학이 형성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Book of Distance>에서 텅빈 암흑 속에 화자가 바닥에 분필을 그으며 이민자의 세계에게 캐나다의 세계로 진입하는 공간적 변화를 표현하는 장면은 인상 깊다. 또한 기억의 ‘거리 감각’를 느끼기 위해 동원하는 사진, 편지, 회화 같은 올드미디어들의 배치와, 관객의 위치-화자의 영역-기억의 무대를 배치하고 혼합했다가 변형하고 해체하는 ‘기억의 흐름 기법’을 따라가다 보면, 거기에는 ‘스크린 관람자’로서 우리가 익숙해하던 공간적 리얼리티 대신, 다른 성질의 공간이 나의 현존을 이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스토리 현존의 언어를 위하여
VR은 단지 스크린 경험의 확장이 아니라 새로운 공간의 감각을 열어준다. 그 공간은 관객이 도착하길 기다리고, 과정을 채색하고, 그리움을 공간에 터뜨린다. 사실적인 재현을 추구하는 공간도 있지만, 인터페이스로써의 유연성을 머금고, 혼합되고 뜯겨지고 생략되고 배치되는 변형의 감각들이야 말로 이 매체만이 가진 긴장감일 것이다.
그러한 공간 속에 처한 관객은, 한편으로 이야기 속에 현존하며 그것과 관계를 맺는 존재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이야기 속을 쏘다니는 관객인 것이다. 공간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 스스로가 ‘제4의 벽’의 표면이 된 관객에게 캐릭터 경험은 어떻게 달라지고, 플롯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그 때 관객은 스스로 어떠한 정체성을 품게 되는 것일까.
계속해서 탐험해보자.
2020년 7월 휴가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