틱같 & 말린

엽편소설

by 최민혁

봄밤이었다. 그는 아파트 로비에 놓여있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천장은 이상하리만치 높고,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바닥이 넓었다. 길게 늘어선 차가운 유리창에 불빛들이 떠다녔다. 그는 좀 전까지 산책을 했고, 거대한 아파트단지를 쏘다녔다. 미끌거리는 흑색 세단들 사이를 지나, 나무벤치에 앉아 있다가, 관리사무소 옆에서 반짝거리는 형광색 주차금지 표시를 보고는 이상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나뭇잎들이 플라스틱 같아. 돌아오는 길에 그는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소파에 앉자, 소파의 냄새가 그를 둘러쌌다. 그리스의 흰 벽에 세워둔 말린 국화 같은 그 냄새는, 돌아오는 길에 자기도 모르게 내뱉었던, '나뭇잎들이 플라스틱 같아'와 혼합되기 시작했다. '뭇잎'이 그리스의 각진 계단들과 포개지고, '플라'가 그리스를 떠올리는 마음 속의 원거리와 교차하고, 그리고, '플라스틱 같아'의 '틱같'과 '말린 국화 같은'의 '말린'이 섞이고 있었다.


그는 그 순간 그 혼합을 사랑했다. 그것은 그리움이 남기는 유일한 것이었다. 봄밤이 윗부분부터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넓은 바닥 속에 계단들이 떠있었다. 수련 같았다. 관리사무소 당직실에서 티브이 소리와 함께 아파트단지가 바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끌미끌 세단들을 맨발로 밟고 다니다가 마음 속의 원거리가 둘둘 되말려 올 때 날카로운 부분에 맨살이 베일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리움의 형식에 아주 잠시만 취할 수 있을 뿐이었다. 주차장이 딸린 거대한 갈비탕집에 다녀온 일 같은 강남의 기억이 마법을 틀어막았다.


그 때 그녀가 등장했다.

- 너구나.


그녀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중학교 동창이었다. 예고를 다녔던 그녀는, 수년동안 자신이 '음악'이라고 믿는 넋 나간 표정과 이상한 말투를 보였었으나, 작년부터 정상으로 돌아왔다. 엘리베이터 안과 밖에 몸을 걸쳐 헤엄치던 그녀가 삼수에 성공하더니 갑자기 철들었다느니, 같은 동에 사는 아주머니들은 그런 말을 주고받았다. 그녀의 그런 증세에 유일하게 호기심을 보이고 다가간 건 그였었다. 그러나 지금 그와 그녀의 관계는 서먹하고 냉담하다. 빨갛고 파란 해커스 토익 교재나 수영가방을 든 그녀를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때 마다, 그는 간신히 그녀를 아는 척 할 뿐이었다.


그녀가 그의 소파 옆에 앉았다. 그녀는 <푸른 아파트>라는 유태인 작가의 소설을 들고 있었다.


- 잠이 안와서.

- 지금 몇시야?


그녀가 그에게 시계를 보여준다. 그는 시계 대신 그녀의 얼굴을 슬그머니 쳐다봤다. 여자 치고는 조금 눈에 띄게 자라는 콧수염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 그는 어느 순간 그녀의 팔이나 목 뒤에 난 털들이 징그럽게 느껴졌었다. 그리고, 그러한 생체적인 거부감이 고개를 들 무렵, 그녀는 점점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는 대학에 붙었다.


둘 사이에는 적막이 흘렀다. 그녀는 책을 펼쳤다. 오십 대 남자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로비로 걸어 들어왔다. 옛날 노래를 부르면서 그 남자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차키로 눌러댔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음악이라고 믿었던 시절이 생각났다.

- 그때 너는 온 몸이 그리움이었어.


그녀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는 한 번 더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이상하리만치 높은 천장 아래에서, 그녀가 읽고 있던 <푸른 아파트>가 산책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옆모습인 채로, 그를 향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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