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하우스 통역사도 즐거웠지만 프리랜서의 꿈은 아직 유효했기에 퇴사는 시기의 문제일 뿐이었다. 입사한 이유가 조직 내 업무 체계를 이해하고 싶어서였는데, 환경도 좋았고 많은 분들의 도움 덕분에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박사과정 진학도 생각하고 있어서 준비할 시간도 필요했다. 총괄 조직 개편을 틈타 프리 선언을 하고 퇴사를 했다. 한창 햇살이 따사로워 노곤노곤했던 늦봄이었다.
프리랜서는 절대 녹록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배들의 고언도, 혹한기보다 무서운 취업난에 어딜 나가냐며 그냥 회사에 있으라는 수석님의 만류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저 하루라도 빨리 밖에 나가서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마음에 몸이 달았다. 퇴사 전 마지막 주에 후임이 겨우 정해지는 바람에 허겁지겁 인수인계를 하고 정들었던 동료들과 송별회를 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늦잠을 자도 뭐라 할 사람 하나 없는 프리랜서가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7시까지만 자도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더니 점점 긴장이 풀려서 9시, 11시, 오후 1시... 기상 시간이 늦춰졌다. 늦잠을 실컷 자고 일어나도 딱히 갈 곳이 없었다.
나는 프리랜서라고 선언을 했는데 실상은 백수와 다를 바 없었다. 그나마 덜 눈치가 보이는 백수랄까. 프리랜서의 프리가 그 프리가 아닐 텐데, 상상 이상의 프리한 나날은 꽤 오래갔다. 선배들에게 프리랜서 통역사가 되면 3년은 놀다시피 한다고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다이어리도 큼직한 걸로 장만했는데 써넣을 일정이 없었다. 회사에서 하루 종일 턱이 얼얼할 정도로 해야만 했던 일이 세상에서 제일 간절하게 하고 싶은 일이 되는 시간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다.
울리지 않는 휴대전화를 하루 종일 끼고 다니다가 저녁이 되면 지쳐서 베란다에 작은 플라스틱 목욕탕 의자를 깔고 혼자 소맥을 마셨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퇴근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해 보였다.
나도 퇴근할 수 있을까... 아니 출근을 해야 퇴근을 하지.
술이 거하게 오른 날은 '나의 프리 인생은 꽃피워보지도 못하고 시들어가는가' 이런 싸이 감성 가득한 일기를 쓰기도 했다.
가을이 가까워졌을 때는 조바심이 극에 달했다. 훗날 생각해 보면 이제 프리랜서로 나왔으니 일이 있으면 불러달라고 주변에 적극적으로 알렸어야 했다. 성격상 아쉬운 소리 하는 걸 싫어하기도 하고, 평소 연락도 없다가 필요하는 연락하는 게 염치없어 보일까 봐하지 못했다. 나중에 내가 선배가 되고 보니 정보 공유 차원에서 이런 연락이 반갑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누가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후배에게 부탁을 하고 싶어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용건 없이 연락한다는 것 자체가 상대방에게 실례가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을 세상에서는 안부 연락이라 부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 후배님들은 프리랜서 전향하거든 꼭 용기 내서 주변에 널리 널리 알리시길 바란다) 아무튼 그렇게 나 혼자 비밀리에 프리랜서로 활동한 덕분에 백수 생활이 더 길어졌던 것일 수도 있다.
친구들은 일요일 저녁만 되면 회사 가기 싫다고 했다. 월요병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거 알까? 월요병도 직장이나 할 일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회사 다닐 때 앓았던 월요병이 이 백수 시절을 거치며 싹 완치가 되었다. 월요병이 있을 수가 없었다. 매일이 토요일이었으니까. 당장 내일 또 놀아도 되는 마음 편한 토요일. 주에 한 번이라도 나가야 할 일이 생기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때의 간절함 덕분인지 지금도 월요병이 없다. 마인드가 바뀌었다.
몇 년 후 프로젝트 통역을 하면서는 매일 아침에 갈 데가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고 기뻤다. 내일은 어떻게 갈까? 차를 운전해서 갈까? 그럼 뉴스를 들을 수 있겠네? 지하철 타고 갈까? 그럼 책을 읽을 수 있을 텐데? 내일은 춥다네, 뭐 입고 가지? 집에 오는 길에는 새로 생겼다는 디저트 가게에 들러볼까? 어딘가에 가야 한다는 것 자체가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일하는 것도 어딘가 가서 돈을 번다는 것도 즐거웠다.
하지만 프리 첫 해에는 평균 한 달에 한 번 통역을 할까 말까 했다. 회사에서는 시간마다 회의가 있어서 하루에 통역 6-8개가 있는 날도 있었는데 연말이 될 때까지 그 하루만큼의 횟수도 채우지 못했다. 그나마도 가을 시즌이 되어서야 선배들이 바빠서 못 한 일들이 낙수효과로 내려와 평균치를 높여주었을 뿐, 여름 같은 비수기에는 달에 한 번도 통역을 못 한 적도 있었다.
그 시절을 어떻게 보냈냐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인터넷을 검색해서 나온 통번역 에이전시에 다짜고짜 이력서를 보냈다. 통번역 업계는 신뢰 평판 업계기 때문에 검증이 안 된 사람은 잘 쓰지 않는다. 때문에 에이전시에 들어가려면 보통은 누군가의 소개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도 몰랐다. 당연히 연락이 안 왔다. 잘 받았다는 회신은 20번에 한 번 정도도 되지 않았다. 남은 시간에는 일단 밖으로 나가서 걸었다. 하루에 3-4시간을 걸었던 것 같다. 동네를 걷고, 상가를 걷고, 한강도 가서 걷고, 비 오는 날에는 백화점 푸드코트부터 옥상정원까지 빙글빙글 돌기도 했다. 그런 나날이 쌓이다 보니 갑작스레 모두가 일정이 안 되는 날이었는지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오기도 했다. 누군가가 '이력서 좀 보내주세요'하면 너무나 기뻐서 그 길로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갔다. 아직 그때는 핸드폰으로 인터넷이 안 되던 시절이었다.
퇴직금으로 버티다가 간간이 들어오는 통역 일은 한 줄기 빛과 같았다. 하지만 나머지 한 달의 29일-30일은 통번역과 전혀 상관없는 일로 연명해야 했다. 회사 다니면서 부었던 고액의 적금은 곧 산산조각이 났다. 많은 사람들이 통번역대학원만 나오면 바로 화려하게 국제회의장에서 통역사로 활약하는 장밋빛 인생을 꿈꾼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통대까지 갔는데 통번역만으로는 살 수가 없었다. 일단 당장 살아남아야 했다.
보람 있고 즐거웠던 업무도 있었지만 하기 싫고 적성에 맞지 않는 일도 있었다. 제일 적성에 안 맞았던 것은 도서 검토였다. 출판사에서 해외 도서를 번역 출판할지 판단할 때 도서 검토를 부탁한다. 해외 도서 한 권을 읽고 전체 요약을 하고 개인적인 서평을 작성하는 것이다. 작업에는 3-4일 정도가 소요되었는데 손에 쥐는 금액은 9만 원 10만 원도 되지 않았다.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 꼬박 일했는데 일당 3만 원도 못 받는 셈이었다.
가장 접근성이 쉬웠던 것은 일본어 강의였다. 문제는 나도 내가 어떻게 일본어를 하게 되었는지 모르는터라 문법 같은 것이 영 꽝이었다. 한국 사람에게 '듣다, 듣지 않고, 들어서, 들은 적 있고' 이런 동사 변형을 설명해 보라고 하면 '아 그게 법칙이 있었어?'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일본어를 가르치기 위한 일본어 법칙을 다시 배워야 했다.
그러다가 그해 가을에는 학원에서 일본으로 대학을 가는 입시생들의 일본어 논술과 구술을 가르치게 되었다. 일본어도 봐줘야 하는데 논술/구술도 함께 가르쳐야 하니 준비할 것이 어마무시했다. 주에 한 번 밖에 안 했는데도 준비만 2-3일씩이 걸렸다.
이듬해에는 내가 강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출판사 분이 '이러닝 강의'라는 것이 있다며 소개를 해주었다. 소개를 했으니 강의료의 1/3을 커미션으로 달라며 이면계약서를 내밀었다. 회사에는 비밀이라고 했다. 별로 경험이 없던 나는 원래 이런 것인 줄 알고 사인을 했다. 벼룩의 간을 내 먹는 인간들은 어디에나 있다. 신인이라 강의료 자체가 낮았고 의상도 개인이 준비해야 했는데 마땅한 것이 없어 새로 구매를 해야 했다. 강의 교안도 작성해야 해서 품이 많이 들었다. 차 떼고 포 떼고 나니 마이너스였다. 촬영용 짐을 한 보따리 싸들고 광역버스를 타고 오가며 '나는 국제회의통역사가 되고 싶어서 통대도 가고 죽자 사자 공부했는데 이게 뭘까. 통번역은 언제 하는 걸까'하고 현타가 온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인생에 버릴 경험은 하나도 없다고 했던가. 당시에는 통번역과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지금 돌이켜보면 다 내 역량이 되고 자산이 되었다. 적성에 안 맞던 도서 검토지만 나름 필사적으로 반복해서 훈련(?) 한 덕분에 요지 파악, 요약정리를 하는 능력이 단련되었다. 이후 박사과정에 진학하면서 하루에도 수많은 논문과 관련서적을 읽고 페이퍼를 써야 했는데 그때의 경험 덕분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속독과 요점 파악 능력이 내 것이 되니 통역용 자료를 당장 몇 백장 받아도 두렵지 않게 되었다.
일본어 강의를 위해 열심히 다시 배운 일본어 문법 덕분에 훗날 내 이름을 붙인 교재를 몇 권 출간할 수 있었다. 만약 이때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거절했다면 이 책들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책 출간으로 인해 통역이나 번역 업무로 연결되는 일들도 있었다. 또 언어를 학문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의 역량 강화에도 큰 도움이 된다. 기업들이 일본어와 관련된 자문을 요청했을 때 논리적으로 답변할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었다.
이러닝 강의 경험은 직업 인생 내내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주었다. 벼룩의 간을 빼 먹힌 첫 강의 덕분에 그 영상 덕분에 더 큰 규모의 회사에 스카우트가 되었다. 좋은 시스템에 돈 주고도 못 받을 좋은 훈련을 받을 수 있었고 지금까지도 이러닝 강사로 커리어를 이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29살 이른 나이에 학부와 대학원 강의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닝 강사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카메라 앞에서 혼자서 40분, 1시간 강의를 이끌어갔던 경험은 훗날 통역할 때, 사회자로 무대에 설 때 진행 능력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당시 이러닝 촬영은 심지어 편집이 아니라 시작부터 끝까지 통으로 NG 없이 찍어야 했다. 버벅거렸다고 헷갈렸다고 카메라를 멈추면 처음부터 다시 찍어야 했고 그러면 나 때문에 모두의 시간과 노동력이 낭비되었다.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위기의 순간을 넘겨야 했고 그런 과정에서 위기 대처 능력을 단련시킬 수 있었다.
결론은 당시에는 통번역만으로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워, 먹고살기 위해 붙잡았던 끈들이 결국 통번역사로 일하는 데 큰 자양분이 되어 주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에 버릴 경험은 없는 게 맞다. 만약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의 커리어와 무관한 것처럼 보이고 하염없이 작고 사소해 보여도 그것으로 인해 갖게 된 능력만큼은 모두 내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한계를 설정하지 말고 초년생 때는 내 일과 더 무관해 보이고 더 멀어 보이는 일들을 적극적으로 도전해 보기를 바란다.
나의 프리랜서 초창기는 대부분 대타로 시작됐다. 동기들, 선후배들이 일정이 안 맞아서 못 하게 된 일을 소개해주었다. 회사에는 후임이 적응하는 기간 동안 외부 교류회 통역을 의뢰해 주셨다. 프리랜서 나왔다는 인사도 못 드렸는데 은사님들도 강의와 통번역 일감을 연결해 주셨다. 주변에 감사한 분들이 정말 많았다. 그렇게 한 걸음씩 차근차근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