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이금희 아나운서의 '마이, 금희'
https://www.youtube.com/watch?v=nnaNoXbM-N4
새해 첫날, 예전에 함께 일했던 지인께서 오랜만에 전화를 주셨어요. 그는 대뜸 물었습니다.
“네가 올해 몇 살이지?”
“이제 마흔 하나입니다.”
“네가 벌써 그렇게 되었다고?!”
믿기지 않는 듯 재차 묻는 그에게, 대답 대신 무심한 시간의 흐름을 탓했습니다. 하지만, 그를 진정 놀라게 한 것은 제 나이가 아니라, 자신의 세월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엄마의 올해 연세를 꼽아보다 깜짝 놀란 저처럼 말이지요.
엄마. 요즘도 고향에 내려가면,
당신은 곁에 누운 제게 “혹시 그때 기억하니?”라고 물으시고는 오래전 추억들을 들려주시지요.
폐렴으로 숨이 깔딱깔딱 넘어가는 저를 품에 안고서 병원으로 황황히 내달린 겨울밤,
글을 가르친 적 없던 제가 길거리 간판을 술술 읽는 것을 무척 대견해하시던 여름 오후,
당신의 일터까지 찾아와 놀다 지쳐 잠든 저를 업고서 돌아오던 가을 저녁.
그 까마득한 시절을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하시는 당신.
수없이 들었던 그 이야기들을 늘 처음 듣는 듯 귀 기울이는 것은,
지금껏 엄마에게 밉게 굴고, 속상하게 만든 적도 참 많았는데,
언제부턴가 당신의 기억 속에 저는 그저 착하고 예쁜 아이로만 남아있음이 감사해서,
엄마가 들려주는 우리 서로 사랑했던 그 날들의 풍경이 참 아름다워서였어요.
그래서 엄마, 당신이 세상의 전부였던 그 시절이 그리울 때면 저는 지금도 가끔씩
골목길 담벼락에 주저앉아 해 저무는 언덕배기를 바라보며 엄마를 무작정 기다리곤 해요.
불타는 놀이 연보랏빛 어스름으로 변해갈 때쯤이면
한 손에는 콩나물, 또 다른 한 손에는 고등어가 담긴 봉지를 들고서 엄마가 총총히 걸어올 것 같아요.
저는 축 늘어져 내 앙상한 발목에 닿는 그림자만으로도 당신을 알아볼 자신 있습니다.
엄마, 그런 당신이 올해로 칠순이 되셨습니다.
언제부턴가 엄마의 나이를 정확히 세는 것이 괜히 싫어서
막연히 육십 대 후반으로만 생각했는데,
제게 그 나잇대 어른이란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나신 할아버지, 할머니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당신에게 저는 아직도 “저녁 먹자.” 소리쳐야 돌아오는 철부지 같을 뿐인데,
시간이 어느새 이만큼 흘렀다 합니다.
이따금 사람들이 제게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저는 대답합니다.
그것은 ‘가난’도 아니요 ‘나의 늙음’도 아닌
‘당신이 없는 세상’이라고.
당신의 깊고 서글서글한 눈을 더는 바라볼 수 없는 세상,
당신의 낮고 보드라운 음성을 더는 들을 수 없는 세상,
당신의 거칠고 따스한 손을 더는 만질 수 없는 세상,
언젠가 마주할 그 세상은 찰나에 상상만으로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
떠오를 때마다 힘껏 도리질하며 애써 외면했습니다.
그런데 작년 봄에 금이 가고서 아직까지 온전치 못한 당신의 무릎을 바라볼 때마다,
앉은자리에서 일어나며 뱉는 “에휴” 하는 당신의 한숨소리를 들을 때마다,
뒤따라 걷다 당신의 발자국이 어느새 팔자가 되었음을 발견할 때마다,
그 상상이 차츰 현실이 되어가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저는 그만큼 더 겁쟁이가 되어갑니다.
하지만 엄마, 아직 저는 세상에 증명해야 할 것이 남아 있어요.
지금은 또래 친구들보다 다소 뒤처지고 부족할지 몰라도,
당신이 평생을 바쳐 기른 제가 고작 이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그 오랜 믿음이 우리 둘만의 착각이 아니라
먼 훗날 우리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남은 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결국 당신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나였음을......
저는 꼭 증명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엄마, 사라지지 마세요.
내 두려움보다 조금 더 세상에 머물러주세요.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당신의 사랑을 받지 않은 적이 없지만,
앞으로도 더 많은 날들을 사랑해주세요.
저도 엄마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