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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관찰자 Jan 03. 2022

디디고 선 땅 위 한 줌의 빛

'사랑'이라 씁니다


 이창동의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단순히 ‘내 취향이다’, ‘재미있다’ 수준을 넘어서 그의 작품을 진심으로 추앙하고 사랑한다. 모든 작품을 소장중이며 생각이 날 때마다 일 년에도 몇 번씩 꼬박꼬박 복습한다. 영화 이야기라면 밤새 떠들 수 있고, 나와 다른 취향에 대해 나름 존중하며 살아왔지만, 그의 작품들을 대중성 운운하며 깎아내리는 사람하고는 한마디도 나누고 싶지 않다. 그 정도로 나의 ‘이창동 사랑’은 지극하다. 나는 왜 그토록 그의 영화를 사랑하는가?          


 그의 작품이 재미있나? ‘재미’라는 감정을 단순히 말초적인 즐거움, 일차원적인 쾌락으로 한정 지을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의 작품에서 ‘재미’를 느껴본 적이 없다. 물론 영화 ‘밀양’에서 종찬(송강호 역)이 주일 예배를 앞두고 교회 앞에서 주차정리를 하다 삐딱하게 댄 차를 보고 투덜대는 씬이나, 영화 ‘오아시스’에서 중국집 그릇을 찾아오던 종두(설경구 역)가 영화 촬영 중인 자동차를 쫓아가다 자빠지는 씬에서는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그것은 그 씬이 웃겨서이지 영화 전체를 ‘재미있는 작품’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럼 그의 작품에서 감동을 받았나?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은 기본적으로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이다. 영화적인 신파나 극적 감동을 추구하는 씬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영화 ‘시’에서 미자(윤정희 역)와 소녀가 번갈아 시를 낭송하는 엔딩시퀀스라던가, 영화 ‘박하사탕’에서 햇빛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스무살 영호(설경구 역)의 모습에서 뭉클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 영화 전체를 '감동적인 작품'이라 말하기도 왠지 찝찝하다.     


 사실 이창동의 감독의 작품을 볼 때마다 내가 느끼는 가장 주된 감정은 불편함이다. 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한심스럽고 대체 왜 저러나 싶다. 때론 우스꽝스럽고 때론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초라한데 어찌된 일인지 외면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 인물들에 동질감이나 공감대를 느껴서가 아니다. 그들은 내가 '저런 사람도 다 있네.’ 하며 속으로 비웃다 지나친 이들에 가깝다.

 오히려 나는 이창동의 '주연'보다 '조연들' 또는 '단역들'에게 낯이 뜨거워질 만큼 나와 닮은 구석을 발견한다. 이를테면 ‘시’ 속에 등장하는 학부모들. 제 자식들이 저지른 성범죄 때문에 어린 소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에도 ‘앞날이 창창한 아이들을 일단 살리고 봐야 하지 않겠나.’라고 모의하는 그들에게서 이미 예정된, 결코 피할 수 없는 끔찍한 내 먼 미래의 한 단면을 본다. 또 ‘오아시스’ 속에 등장하는 평범한 사람들. ‘종두’와 ‘공주’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식당에서 쫓겨날 때, 자기 일 아니다 싶어 그저 침묵하다, 골이 난 종두가 식당 텔레비전 채널을 아무렇게 돌리자 그제야 “아저씨 한참 보고 있는데 왜 그래요?”라고 말하던, 그래놓고 종두가 “뭐? 뭐가!?”하며 위협하며 다가오자 찍소리 못하는 그 모습은 지금까지 잘 감춰온, 앞으로도 결코 들키고 싶지 않은 비겁한 나였다.

 결국 나는 이창동의 ‘영화’를 통해 내가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세상과 또 다른 이웃, 또 다른 나를 마주한다. 그가 보여주는 세상은 결코 아름답지 않고, 내 이웃은 친절하지 않으며, 나는 창피함을 모른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이 사실을 굳이 그의 영화를 통해 복습하는 이유는 내가 염세주의자거나 비관론자라서가 아니다. 진짜 이유는 그의 작품을 통해 ‘부끄러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부끄러움     


이것을 누군가는 사자성어를 들어 수오지심(羞惡之心)이라 했다. 내게 부끄러움은 사람이 사람다운지를 판단하는 가장 큰 기준이다. 나는 부끄러운 줄 모르는 자들이 가장 혐오스럽고,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르는 사람에게 연민과 애정을 느낀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나다운 모습은 '빈틈없이 완벽한 나'가 아니라 '실수와 허물을 부끄러워하는 나'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껏 살아오며 가장 많이 잃어버린 것도 바로 그 부끄러움이었다.     

 영화 '박하사탕'이 처음 개봉했던 날은 우리가 스무 살이 되던 2000년 1월 1일이었다. 그해 이 영화를 봤던 동갑내기 친구들 중 어느 누구도 선로에 서서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는 마흔 살의 영호를 완벽히 이해하진 못했으리라. 그 때에 우리는 그저 사진사가 되어 꽃을 찍으며 살고 싶었던 스무 살 영호, 공장에서 박하사탕을 하루에 천개씩 싸던 스무 살 순임이었다. 그 시절 영호가 그랬듯 우리는 아름다움에 눈물 흘리는 것이 창피하지 않았고, 순임이 그랬듯 사랑하는 이의 꿈이 이뤄지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또 돕고 싶었다.


마흔 살의 영호, 스무 살의 영호


 그러나 이십여 년이 지난 우리는 어떠한가? 강둑에 천막을 쳐놓고 뽕짝에 맞춰 몸을 흔들던 영호의 옛 친구들처럼, 노래방이나 룸살롱에서 떼거리로 춤을 추고,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조카뻘 되는 아가씨들의 몸을 더듬는다. 감동을 느끼는 일보다 쪽팔리는 일이 훨씬 많아졌고, 스무 살짜리의 꿈을 들으면 ‘그게 어디 네 맘대로 되나 봐라.’하며 콧방귀를 뀐다. 누군가는 강사장처럼 친구를 등쳐서라도 잘 먹고 잘 살 것이고, 누군가는 영호처럼 끝없는 절망에 지금 철길 위를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창동 감독은 20년 전 개봉 당시 그 영화를 만든 이유로 ‘순수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서’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 순수했던 우리는 지금 어떤가. 영화 속 꼴사납고 한심한 중년들이 아니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차마 그럴 수 없어 부끄러운 것이다.


 이창동의 영화에는 그렇게 내가 잃어버린 것들로 가득하다. 가족에 대한 맹목적인 헌신(초록물고기), 지극히 순수했던 꿈 그리고 사랑(박하사탕), 예쁘지 않음을 편견 없이 바라보는 마음(오아시스), 인간과 세상에 대한 꾸준한 믿음(밀양), 잘못된 것을 외면하지 않는 용기(시) … 한때는 내 것이었으나 이제는 사라진 그 것들을 이창동의 영화 속에서 다시 조우할 때면 내 얼굴은 화끈거리고 몸은 베베 꼬인다. 그렇게 어쩔 줄을 모르다 ‘이렇게 사는 게 진짜 맞나?’를 고민한다. 그 물음의 답은 쉽게 찾을 수 없고, 그나마 가지고 있다 믿은 것들마저 언제 잃게 될까 불안해할 때, 그 날의 내 모습이 이창동의 영화 속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만 같을 때,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좀 더 사람답나?’를 스스로에게 물어볼 때, 결국 내가 나로써 살아가게 만드는 것. 영화 <밀양>에서 신애(전도연 역)가 그랬듯 결국 내가 지금 디디고 선 좁은 땅 위에 한 줌의 빛만큼 남겨진 것. 그것이 바로 '부끄러움'임을 새삼 깨닫는 것이다. 


이창동의 영화를 볼때마다 러시아의 대문호 안톤 체홉이 했던 명언을 떠올리곤 한다.


달이 빛난다고 말해주지 말고,
깨진 유리조각에 반짝이는 한줄기 빛을 보여줘라    


22년 1월 27일, 2월 2일 고쳐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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