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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수 Mar 23. 2022

#01 - 혼돈의 카이로

인정해야만 했다. 나의 허약함을.

카이로는 매운맛


지하철 Nasser역 근처에서 내려 100여미터를 걸어 숙소가 있는 건물 앞에 도착했다. 카이로 시내에는 지어진지 최소 50년쯤 되어보이는 건물들이 많았다. 내가 묵을 숙소는 100년쯤 된거 같았다. 마치 영국인들이 이집트를 수탈하러 왔다가 지어놓고 간것 같이 생겼다. 엘레베이터를 보니 정말 100년쯤 되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솔직히 조금 후회했다. 좀 더 비싸지만 좋은 방으로 잡을걸 그랬나 하며. 그런데 의외였다. 방은 꽤 괜찮았다. 비록 건물은 낡았고 바닥이 좀 삐걱대긴 했지만 방은 넓고 큰 테라스도 있었으며, 따뜻한 물도 잘 나왔다. 아고다 최저가 싱글룸치고 이정도면 아주 감사했다. 나는 몹시 만족스러워서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었다. 비행기에서 싸온 기내식 빵을 마저 뜯어먹으면서 오늘 가볍게 어디를 가볼지 구글맵을 검색했다. 이곳 사람들 사는 모습을 좀 보고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시장이 최고다. 2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칸엘칼릴리라는 전통시장이 있었다. 2킬로미터 정도면 살살 걸어서 다녀올만 했다. 마침 관광객들에게도 꽤 유명한 곳이라고 했다.

이게 뭐야 무서워
숙소 앞 거리

숙소를 나와 구글맵을 찍고 시장을 향해 살살 걸었다. 카이로 시내는 혼잡했다. 무엇보다 몹시 시끄러웠다. 수많은 자동차들이 시도때도 없이 크랙션을 울리며 달리고 있었다. 이집트사람들은 수다떠는것을 좋아한다는데 자동차들끼리도 크랙션으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당연히 신호등이나 횡단보도 따윈 없다. 도로와 인도가 구분되어 있긴 했지만 무의미했고, 너도 나도 무단횡단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무단횡단으로 길을 건너다닌다면 그건 더이상 무단횡단이라 부를수 없는게 아닐까 싶었다. 우리가 말하는 무단횡단이 그곳 사람들에게는 길을 건너는 보통 방식인거지. 판데믹으로 반도에 갇혀버린 나의 사고방식을 반성하며 그들의 방식에 동참하려 했다. 그런데 쫄려서 도저히 못가겠더라. 그래서 그곳 사람들이 건널때 눈치것 따라 건넜다.

여기 이런데를 저 너머 동상 지나서까지 알아서 잘 가야만 한다.


두어 블록을 지나니 현지인들의 시장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내가 목적지로 삼은 칸엘칼릴리 주변 약 1킬로미터정도가 다 카이로 시민들이 이용하는 시장통이었다. 코로나 터지고 난 이후에 사람이 이렇게 많이 모인 광경을 처음봤다. 가득 찬 인파 사이를 뚫고 가끔 짐을 나르는 수레가 지나갔다. 그럴때 마다 흐름은 정체되었으며, 수레꾼은 너무나 태연하게 사람들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한쪽에선 뭐가 문제였는지 싸움이 벌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또 아이들이 장난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에게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이집트의 시장에서는 호객행위가 엄청나다고 들었는데 다들 그저 장사에만 열중할 따름이었다. 사진으로라도 남겨두고 싶었는데 정말 사람이 너무 많아서 휴대폰을 꺼내 들수도 없었다. 휴대폰을 꺼내려고 가방을 여는 순간 지갑이고 가방이고 다 털릴거 같아 무섭기도 했다. 내가 오로지 할 수 있었던 일은 인파와 함께 그저 묵묵히 걷는 것 뿐. 객관적으로 몹시 흥미로운 풍경이었겠지만 24시간동안 잠도 제대로 못자면서 비행기 타고 날아온 나는 한겨울의 휴대폰 마냥 에너지가 죽죽 떨어지는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솔직히 중간쯤까지 왔을 때 그냥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퇴로는 없었다.그저 길의 끝까지 묵묵히 갈 수 밖에.  고작 1킬로미터 가량을 한시간이 넘게 휩쓸려 간 끝에 드디어 칸엘칼릴리에 도착했다. 이곳은 훨씬 여유로웠다. 아무래도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시장이다 보니 길도 넓고 다니기도 편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방에서 공격이 들어왔다. 길 양쪽의 가게들이 너 이놈 잘만났다는 기세로 호객행위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니 하오 니하오 마이프렌  컴앤 씨 베리 칩 프라이스."


이 사람들은 동양인을 보면 일단 ‘니하오’부터 박고 시작했다. 마치 옛날에 우리가 서양인을 보면 국적 불문 '헬로우'부터 치고 시작하듯. '니하오' 공격을 한 400미터 걸어가면서 계속 받으니 길거리에서 조리돌림 당하는 죄수의 심정을 이해했다. 나는 완전히 지쳤다. 여기는 체력을 좀 보충하고 다시 와야 할 곳이었다. 비교적 덜 붐비는 큰길을 따라 숙소로 천천히 돌아갔다.

시장통 초입. 이때만 하더라도 오렌지쥬스 사서 빨아먹으며 희희낙낙 했다.

간단한 먹을거리를 사서 숙소로 돌아오니 저녁 6시쯤,괜히 이집트가 인도와 함께 매운 맛 여행지의 투 탑이라 불리는게 아니었다. 공항버스를 성공적으로 타고 왔다는 것 하나로 자만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인도의 호객꾼들과 이집트의 호객꾼은 결이 좀 달랐다. 둘 다 끈질긴건 마찬가지였지만 인도 사람들은 은근슬쩍 다가와서 슬그머니 호객을 시전하는 반면 이쪽 사람들은 대뜸 니하오를 박으며 소리부터 지르고 시작하다보니 치고 들어오는 힘이 인도보다 더 강했다. 코로나 전에는 이 정도라면 충분히 버텨낼 수 있었겠지만, 2년간의 공백은 심각한 여행근손실을 초래했고, 허약해진 나는 풀죽은 똥강아지마냥 숙소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앞으로의 여행 과연 괜찮을까? 그래도 집에 돌아가긴 (당연히) 싫었다. 이제와 돌이킬 순 없다. 일단 씻고 자기로 했다. 


그래도 칸엘칼리리 시장 주변의 이런 건물들은 멋지긴 했다.


이것이 이집션 타임이다!


실컷 잤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뜨니 아침 일곱시였다. 2월 카이로의 밤은 꽤 추웠다. 혹시나 싶어 여행용 구스담요를 가져왔는데 그러지 않았으면 밤새 벌벌 떨뻔 했다. 씻고 나와서 맥모닝을 먹으며 어딜 먼저 가야할까 고민했다. 어제 호되게 한번 당했으니 욕심내지 않고 초심자코스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카이로 박물관과 기자의 대피라미드로 정했다. 카이로박물관은 9시에 오픈이었고, 슬슬 걸어서 이동하면 시간이 딱 맞았다. 아침 카이로 시내의 거리는 한산했다. 이제야 거리가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하나같이 짓다만거같은 건물이 대부분이다. 쌓다만 벽돌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거나, 건물을 올리다 만 것 처럼 철근콘크리트 기둥이 그대로 옥상에 드러나 있었다. 알고봤더니 이집트는 건물을 완성하게 되면 세금을 추가로 내야 한단다. 그래서 건물을 짓다 만 채로 사용하는거라고. 짓다 만 건물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 카이로 특유의 정취로 느껴졌다. 그렇다고 그렇게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도대체 왜 그런 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만의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했다. 

건물들을 하나같이 짓다 말았다.


카이로 박물관에서 카이로패스를 구매해야 했다. 카이로패스는 100달러에 카이로권 유적들의 입장권이 모두 포함된 일종의 자유이용권이다. 더군다나 카이로패스를 가지고 있으면 룩소르패스는 반값으로 할인이 되었다. 고대의 거대한 건축물만 보면 정신을 못차리는 나에게는 필수였다. 9시에 박물관이 열리자마자 티켓 오피스에서 카이로패스를 구매하고싶다고 물어봤다. 티켓오피스 직원은 박물관 입구 표검사 직원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표검사 직원에게 카이로패스를 구매하고 싶다고 물었더니 아직 담당 직원이 출근을 안했다며 10시에 오라고 했다.

그럼 그렇지. 제때 문을 열리가 없지. 박물관 오픈 시간이 9시인데 어째서 10시에 출근하는지 그런건 알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런거다. 어제의 혼돈을 겪은 나는 이제 웬만한 일에는 당황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기에 알겠다고 하고 박물관 앞의 정원을 거닐었다. 박물관 앞에는 대충 봐도 한 4000년쯤 되어보이는 조각상들이 마구 방치되어 있었다. 자세한 설명도 없었다. 안에 자리가 없어서 그냥 대충 거기다 세워놓은것 같았다. 인류 최초의 문명이 보여주는 위엄에 살짝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박물관에 대한 기대가 한층 더 높아졌다.

어느새 10시가 되었고, 나는 그 직원에게 이제 카이로 패스를 살 수 있냐고 물어봤다. 그는 오분만 더 기다리라고 했고 순순히 오분을 기다렸다. 이제 되냐고 물었다. 또 오분만 더 기다리라고 했다. 순간 깨달았다. 아 이친구들의 5분만 기다리라는 말을 내가 너무 한국식으로 해석하고 있었구나. 오분만 기다리라는 말인 즉슨 ‘언제 될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야’ 라는 뜻이었다. 그래 내가 아직 참을성이 부족했나보다. 하지만 마냥 기다릴수는 없었다. 이 난국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다음편에 계속)


카이로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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