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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수 Apr 10. 2022

#04 - 이집트에서 코로나19 당첨

코로나19를 겪는 1류 여행자로서의 자세

알렉산드리아로 세월아 네월아


오늘은 2월 12일, 알렉산드리아로 이동하는 날이다. 지난 편에 알렉산드리아의 어감이 참 좋다고 했다. 한편으로는 한국의 두 세 음절짜리 도시 이름에 익숙한 나에게 ‘알렉산드리아’는 도시 이름치고 너무 길다. 그래서 앞으로는 줄여서 알산으로 부를 것이다. 알산은 이집트 제2의 도시로, 클레오파트라로 유명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기의 수도다. 카이로에서 북서쪽으로 18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지중해변에 있으며, 기차로는 3시간가량이 걸린다. 알산은 카이로에 비해 덜 혼잡하면서도 도시가 비교적 잘 정돈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카이로의 혼잡함에 조금씩 지쳐가던 나에게 알산으로의 이동은 마치 힐링시티 떠나는 거 같은 기대감을 자아냈다. 아침에 일어나 역으로 이동했다. 숙소에서 역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지만 혼잡한 도로를 세 차례 무단횡단해야 갈 수 있다. 아직도 무단횡단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그래도 몇 가지 요령을 익히긴 했다. 이집트에서 무단횡단할 때의 중요 포인트는 바로 차가 온다고 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나는 일정한 속도로 도로를 걸어가면 되고, 자동차들은 나의 속도와 진행방향에 맞춰 알아서 나를 피해 간다. 이게 바로 카이로의 도로 위에서 신호등보다 우선하는 무언의 약속이다.

카이로 람세스 역

아무튼, 카이로 람세스 역에 도착하니 9시 30분, 아직 출발까지 3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카이로 역은 크고 무진장 붐볐다. 천장이 블랙홀의 내부 같은 모양으로 멋있게 꾸며져 있었다. 내가 탈 기차는 알렉산드리아행 911번 열차다. 전광판에는 아랍 숫자로만 안내가 돼 있다. 아랍 숫자로는 ‘911’이 [٩١١]이다. 이건 그래도 좀 알아보기 쉽게 생겼다. 전광판을 보니 [٩١١] 번 열차는 [٤] 번 플랫폼에서 출발한다고 나와 있었다. 보자.. 3을 거꾸로 쓴 거 같이 생긴 숫자는.. 바로 ‘4’다. 4번 플랫폼이 내가 가야 할 곳이다. 4번 플랫폼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가니 왠지 타야 할 거 같이 생긴 기차가 서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역무원으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물어봤다. 역시나 Sir을 붙여가며 이야기하는 건 필수다. 그는 알산으로 가는 기차가 맞다고 했다.

좌: 카이로 람세스역 내부,  중: 전광판 모습. 실컷 아랍숫자로 찾아놓으니 알파벳 안내도 나왔다..., 우: 플랫폼

기차 안은 의외로 깨끗하고 좌석도 꽤 괜찮았다. 우리나라의 무궁화호 객실 정도는 되었다. 내 자리를 찾아 앉았다. 앉아서 기차에 타는 사람들을 멍하니 구경했다. 신기한 거는 사람들이 대부분 감자칩을 몇 봉지씩 들고 타는 거다. 그 이집트 감자칩 중에 제일 많이 보이던 Lay’s라는 브랜드 있다. 시큼털털한 게 한국 꺼랑은 꽤 맛이 다르긴 하지만 왜인지 자꾸 생각나는 그런 맛이다. 아침을 많이 먹어서 굳이 뭘 더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물 한 통만 사서 기차에 올라탔는데 그걸 보니 나도 한두 봉지 사 올걸 싶었다. 내 자리 옆에는 제발 아무도 앉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건만 아저씨 한 명이 역시나 Lay’s 감자칩을 잔뜩 들고 옆에 앉아버렸다. 쳇.

열차 안

기차는 정시에 출발했다. 기차가 출발하자마자 내 옆에 앉아 있던 아저씨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화장실 갈 때 보니 객차가 연결되는 곳에서 줄담배를 피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나야 편하게 가고 좋지. 카이로 시내를 벗어나니 나일강 삼각주의 풍경이 펼쳐졌다. 지평선 저 너머까지 모두 농지였다. ‘이것이 이집트 문명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던 농업 생산력의 근원이구나!’ 하며 나일강 뽕을 한 사발 거하게 들이켰다. 그런데 가도 가도 당최 풍경의 변화가 없었다. 곧 심심해졌다. 휴대폰으로 영화를 한편 보고 있는데 열차가 역에 멈춰서 아예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가다 서다 하긴 했지만 멈춰 있는 시간이 꽤 길었다. 벌써 도착한 건가? 그건 아닐 텐데 싶어 구글맵을 켜 보니 탄타라는 곳이다. 곧이어 뭐라 뭐라 방송이 나왔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열차는 계속 멈춰 서 있었다. 곧 출발한다는 내용은 아니었나 보다. 왜 멈춰있는 건지 이유 정도는 알고 싶어서 옆자리 아저씨에게 물었지만 아저씨는 영어를 모른다. 이렇게 열차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멈춘 상황에서 분노할 필요는 없다. 이집트에서 매사가 정시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자는 3류다. 화를 내지는 않지만 이유는 알고 싶어 하는 자는 2류다. 그냥 받아들이는 자. 그자가 바로 1류다. 1,2,3류 저런 건 누가 정한 거냐고, 왜 그런 거냐고 묻지 마라. 받아들여라. 그냥 받아들이는 당신이 바로 1류다. 이건 인도 여행에서도 마찬가지다. 기관사 아저씨도 퇴근이라는 걸 해야 할 테니 오늘 안에는 어떻게든 가겠지.

나일강 삼각주. 이런 풍경이 내내 이어진다.



당첨!!


기차는 두 시간쯤 탄타에 서 있다가 출발했고, 알산에는 오후 세 시, 출발한 지 다섯 시간 만에 도착했다. 그래 이 정도면 선방했다. 해 떨어지기 전에 도착한 게 어디냐. 숙소는 기차역에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바다 근처에 있었다. 슬슬 걸어서 이동했다. 듣던 대로 알렉산드리아의 거리는 비교적 잘 정돈되어 있었다. 숙소에 도착해서 체크아웃을 했다. 아고다 어플에서는 숙소에서 카드결제가 된다고 분명히 적혀있었는데 막상 가니까 카드 결제가 안된다고 현금을 내놓으라고 했다. 그럼 그렇지. 나는 1류 여행 자니까 이런 거에 당황하거나 화를 내거나 하지 않는다. 그래도 숙소는 꽤 괜찮았다. 역시나 아고다에서 제일 싼 싱글룸으로 예약했는데 더운물도 잘 나오고 침대도 꽤 깨끗했다. 많이 피곤했다. 잠깐 침대에 누워서 쉬는데 피곤함이 도무지 회복이 되지 않았다. 고작 기차 다섯 시간을 탄게 몸에 무리를 줬나? 앗. 그런데 어제부터 콧물이랑 잔기침이 멈추지를 않는다. 이거 뭔가 이상한데 생각한 순간 머릿속에 느낌표가 떴다! ‘코로나!’ 전에 코로나19에 감염된 친구가 말하기를 코로나에 걸리면 머리 위로 느낌표가 딱 뜬다고 했다. ‘이거 코로나인가?’가 아니라 ‘이건 코로나다!’라고 말이다. 어제 오후쯤부터 목이 칼칼하고 기침과 콧물이 나기는 했지만 나는 그저 카이로의 대기오염 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작 기차 5시간 탄 거로 유난히 피곤해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나니 이 모든 현상들이 코로나19 하나로 연결이 되었다.  한번 더 머리 위로 느낌표가 떴다. ‘그래 이건 분명 코로나다!’ 확실히 하기 위해 한국에서 가져온 신속항원검사 키트를 꺼냈다. 진짜로 이걸 쓰게 될 줄이야. 콧구멍을 면봉으로 정성스럽게 깊이 쑤셨다. 설명서에 나온 대로 왼쪽 오른쪽 열 번씩 돌렸다. 면봉을 용액에 담그고 잠시 뒀다가 검사 키트에 몇 방울 떨어뜨리고는 기다렸다. 그래 아닐 거야. 설마. 난 백신도 세 방이나 맞았다고. 용액이 키트를 타고 천천히 올라갔다. 한 줄이었다. ‘그럼 그렇지 내가 코로나 일리가 없지.’ 짐을 풀고 나갈 준비를 마치고 테이블에 둔 검사 키트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려고 집어 들었다. 그런데 T라고 적힌 쪽에 희미한 줄이 보였다. 젠장 난 코로나였구나! 심지어 희미한 줄은 점점 짙어지기까지 했다.

왠지 그냥 버리면 안 될 거 같아서 비닐에 포장해서 버렸다.

내가 아무리 1류 여행자를 자칭한다지만 전염병에 걸리고도 평정심이 유지되지는 않았다. 만약 그게 된다면 종교지도자를 해도 되겠지. 인터넷에 감염 사례를 검색해서 자가진단을 했다. 아직까지 내 증상을 보았을 때 무증상에 가까운 거 같았다. 열도 나지 않고 목이 좀 칼칼할지언정 심하게 아프지도 않았으며, 기침도 평소보다 잦았지만 심하게 나지는 않았다. 하루정도 쉬고 나면 다시 돌아다녀도 될 거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코로나는 최소 5일은 전파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냥 막 돌아다니면서 바이러스를 뿜 뿜 하면 이집트에 생물학 테러를 저지르게 되는 건가? 그럴 순 없는데 이집트 보건당국에 신고를 해야 하나? 그런데 괜히 신고하면 잡혀가는 거 아니야? 그냥 가만히 숙소에 한 5일 짱 박혀 있으면 되는 건가? 아무리 혼자서 시나리오를 써 봤자 소용이 없었다. 숙소 리셉션에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전화가 되지 않아서 굳이 내려가야만 했다.


나 : 저기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내가 만약 COVID-19에 걸리면 어떻게 돼?


휴대폰으로 뭔가를 열심히 보고 있던 직원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직원 : 너 많이 아파?

나 : 아니 그건 아니고 내가 걸렸다는 게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직원은 흘깃 나를 쳐다보았다.


직원 : 아파 보이진 않는데 무슨 문제 있어? 아프면 그냥 숙소에서 쉬어 약국은 요 밑으로 내려가면 있어. 그 외에 또 필요한 거 있어?

나 : … 아니야 난 갈게


직원의 대답에 김이 팍 새어부렀다. 그렇다. 여기는 한국이 아니었다. 카이로에서부터 아무도 마스크 따위 쓰고 다니지 않았다. 여기서 코로나는 이미 지나간 이야기였다. 자가격리의 개념 자체가 사라진 지 오랜지. 게다가 오미크론 변이의 강력한 전파력을 생각하면 이미 한 두 달쯤 전에 한번 휩쓸고 지나갔을 법했다. 다시 한번 좁은 반도의 시스템에 갇혀있던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일단 오늘은 숙소에서 쉬기로 했다. 먼저 코로나에 걸렸던 친구 말에 의하면 본인은 확진 판정받고도 멀쩡하다가 밤부터 몸살기가 확 올라서 하루정도 꽤 고생했다고 했다. 나 역시 지금은 콧물이나 좀 나는 게 다지만 괜히 돌아다니다가 세게 아프기 시작할 수도 있다. 그건 정말 답이 없는 일이다. 나는 근처 슈퍼에서 딸기와 다른 먹을거리 마실거리를 좀 사서 방으로 올라갔다.

어디서 옮은 건지를 밝혀내는 것은 무의미하겠지만 알고 싶었다. 한국에서 알산까지 나름 마스크를 열심히 쓰고 다녔다. 그런데 마스크를 벗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곳이 딱 한 군데 있었다. 바로 쿠푸왕의 피라미드 안. 거기는 좁고 덥고 사람도 많은 데다 계단까지 올라야 해서 마스크를 쓴 채로는 도저히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래 그곳이구나. 피라미드 안에서 난 코로나에 옮은 거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기왕이면 피라미드 안에서 걸린 거라고 해 두기로 했다. 식당에서 걸린 거 보다는 피라미드 안에서 걸렸다고 하는 게 더 있어 보이는 건 사실이다. 그래 난 피라미드 파워를 담은 코로나에 걸린 거다. 제발 피라미드 파워로 바이러스들도 순해져 있기를. 딸기 맛이 잘 안 느껴지는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이겠지.

저녁은 근처 까르푸 마켓에서 사 온 코샤리다.

2월 13일의 아침이 밝았다. 다행히 자는 동안 증상이 심해지진 않았다. 개운하게 일어났고, 피곤함도 사라졌다. 사실 아프기까지 했으면 꽤 억울할 뻔했다. 백신을 세 방이나 맞았고, 백신 부작용도 세게 앓았는데 코로나로 또 아픈 건 이건 정말 아니지 않냐고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냐고 창밖으로 소리 지르며 하늘에 대놓고 삿대질이라도 했을 거다. 그렇지만 비로소 코로나에 걸리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던 불안감이 사라졌다. 이게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뭐 어째튼 코로나까지 치렀으니 오늘은 비싸고 맛있는 걸 사 먹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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