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버닝 감상평
이창동 감독이 만든 버닝이라는 영화를 관람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심장이 쪼그라드는 듯 했고, 영화를 다 본 후에는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취향에 안맞는 영화라고 결론내고 잊을수도 있지만 어째서인지 버닝이라는 영화는 며칠 동안 머릿속에 맴돌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버닝은 내가 살면서 본 영화 중에 손가락 안에 들어갈만큼 명작이라고 생각한다. 며칠동안 버닝에 대해 계속 생각하면서 한국에서도 이런 작품을 볼 수 있어 너무 좋았다.
벤은 감정 변화가 거의 없고, 무엇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는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고 자신을 중심으로 세계가 돌아간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신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불법적인 행동이라도 사회적으로 처벌받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법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요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 마음대로 할수 있기 떄문이며 음식은 자신에게 바치는 재물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나르시시즘도 있는 것 같다.
벤은 후반부에 새로운 여자친구에게 화장을 해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면도 마치 자신에게 바칠 재물을 준비하듯 보인다. 벤이 다른 사람을 대할때보면 같은 인간으로서 대한다기보다 도구로 대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에게 해미도 그저 흥미롭고 자신을 재밌게 해 줄 도구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벤에게 새로운 여자친구가 생겼을때도 그저 새로운 장난감 생긴 듯 해미에게 했던 행동과 동일하게 대한다. 물건을 소비하듯, 사람도 교체하면서 계속 소비하는 것이다.
해미는 나레이터 모델이고, 밝고 잘 웃으며 감성적이다. 하지만 그녀는 경제적으로 늘 불안정하며 가족과 단절되어 있고 누군가와 깊은 인간관계를 맺은적이 없다. 겉으로만 봤을 때는 사회에 편입된 사람인데, 실제 그녀는 사회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다. 현대사회는 SNS, 외모, 타이틀 등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포장하지만 그로인해 해미처럼 사회에서 사라질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상상하기 더 어려워졌다. 그런데 우리가 못본척 했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사실 내가 초등학교 다닐때도 해미와 같은 아이가 있었다.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그 아이에게 말거는걸 본 횟수가 1년에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렇게 우리 반은 6학년때도 인원 변경 없이 그대로 올라갔는데, 5학년 담임선생님이 6학년 담임선생님께 인수인계를 할때 그 아이를 신경쓰지 못했으니 잘 좀 부탁한다고 인수인계를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6학년때 담임선생님도 그 아이에게 관심이 없었다. 사실 그 아이가 가난하다거나 못생겼다거나 왕따를 당한다거나 그런것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아이였고 아이들이랑도 잘 지냈는데 같은 일이 반복된 것이다.
사실 버닝을 보고나서 그때 일을 생각해보면 그 아이는 가난하지도 않았고, 외모때문에 튀지도 않았고, 사고를 친것도 아니고, 친구들도 있었으니까 사실 어른들이 개입할 이유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관심을 받는 아이들은 보통 성적이 좋거나, 사고를 치거나, 가정사가 눈에 띄게 복잡한 아이인데 관심을 못받는 아이는 그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는 쪽이된다. 한마디로 시스템의 관리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담임 선생님이 인수인계를 주고 받아도 변화가 없는 것이다.
버닝에서는 실존이라는 개념을 중요하게 다룬다. 처음에 해미가 판토마임을 하면서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한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 후에 종수가 해미네 집에서 고양이 보일이에게 밥을 주는데, 사실 고양이가 정말로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다. 심지어 주인집 아주머니는 이 건물에서 고양이는 못키우게 되어 있다며, 고양이가 있을리 없다고 말한다. 이후 해미네 집 앞 우물 이야기에서 우물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서 진짜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이후 벤이 해미를 죽였을거라는 심증은 들지만 증거는 없고, 해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조차 알수는 없다. 이런 장면들을 통해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에게 의미가 있었는지 아닌지가 중요하다. 해미는 판토마임을 하면서 중요한건 실제로 있는지가 아니라 믿는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고양이 보일에 대해서도 종수는 밥을 주러 가면서 고양이의 흔적을 보았을 뿐 실제로 보지는 못했다. 해미는 우물에 빠졌다고 하고, 정작 가족은 우물 없었다고 말하고, 이웃들의 기억도 엇갈린다. 우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보다는 해미의 고통이 모두의 기억속에서 사라지며 마치 없었던 일처럼 대하는게 소름이다. 영화 후반부에는 해미 자체가 사라지지만 영화에서 조차 그녀가 죽었는지 안죽었는지는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여기서 벤과 해미의 차이점이 존재한다. 벤은 작중에서 자신은 어디에나 존재한다고 말한다. 벤은 스스로를 증명할 필요도 없고, 설명 안해도 되고, 어떤 행동을 하든 의심받지 않는다. 반면, 해미는 항상 자신이 하는 일을 설명해야하고, 믿어달라고 말하지만 모두의 기억에 쉽게 잊혀진다.
존재여부가 확실한지 아닌지 헷갈리는 것들은 작중에서 모두 사람들이 관심없는 것들이다. 주인집 아주머니는 고양이에 당연히 관심없고, 가족들은 해미에게 빚 청산하기 전까지 집에 오지 말라는거보면 해미에게 관심이 없어보이는데, 그러니 우물도 그들에게 중요한게 아니니까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 벤에게 해미는 소모품이고 나중에 새로운 여자로 바꿨으니 당연히 해미에게 관심이 없다. 그런데 중요한건 이 모든 걸 종수는 믿었다는 것이다. 종수는 고양이를 보지 못했지만 밥그릇을 비우며 있다고 믿었고, 우물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있다고 믿었고, 해미는 자신에게 중요한 존재였으니까 혼자 벤을 미행하면서 해미의 존재를 믿었던 것이다.
물류센터 지원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번호로 부르며 말하는데 종수는 3번이었다. 1번과 2번이 일하고 싶다고 어필하고 3번 종수 차례가 되자 종수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다. 사실 이건 고용주 입장에서는 1번이든 2번이든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고 역시 알바 또한 소모품으로 여기는것이다. 종수가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것은 자신은 소모품 취급 당하기 싫었던 거라고 느껴졌다.
나는 군대에서 이런 감정을 많이 느꼈다. 군대라는 조직은 사실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가는 조직이고, 내가 군대생활하는 2년동안 사회는 나없이도 너무나 잘 돌아갔다. 나는 세계의 필수 조건은 아니었다. 영화 버닝은 물류센터나 큐레이터 모델로 표현했지만 어쩌면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나 역시 누군가에겐 소모품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책을 쓰지 않아도 출판시장은 잘 돌아갈거고, 내가 개발을 하지 않아도 다른 AI 개발자는 많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가 말한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 개념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존재감없이 소모되는 인생이 리틀 헝거라고 하면 그레이트 헝거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리틀 헝거는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며 역할을 수행하며 일해서 먹고 사는, 자신을 소모 하면서 유지하는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그래서 내가 없어도 시스템은 잘 돌아가고, 대체자는 수도 없이 많다. 내가 빠져도 아무도 흔들리지 않는, 너무나 시스템에 잘 적응한 인생이다. 반면, 그레이트 헝거는 단순히 더 인정받고, 더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레이트 헝거는 대체 가능하더라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추구한다.
영화에서 종수는 초반부터 그레이트 헝거였지만 자기 자신도 확신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해미와 사랑을 나누는 순간에도 창밖의 남산타워를 바라보는데, 나는 그 이유가 더 높은 곳, 아직 닿지 못한 세계를 바라본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종수는 물류센터에서 일을 할수도 있었고, 아버지의 농장을 이어받을 수도 있었다. 리틀헝거로 살 조건은 충분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물류센터에서 탈주했고, 송아지를 팔아버린다. 특히 송아지를 파는 장면은 아버지의 삶, 이 집안이 살아온 방식대로 이어서 살기보다는 자신의 방식으로 살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종수는 안주를 거부했던 것이다. 그래서 작중 내내 종수의 눈빛은 늘 불안정해보인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에는 눈빛이 또렸하게 바뀌며 드디어 자신의 소설을 몰입하면서 쓰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종수가 소설을 쓰지 않더라도 소설가는 많다는 점에서 종수의 소설조차 누군가에게는 소비되고 끝날수 있지만, 적어도 종수 스스로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남기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나는 왠지 이 영화가 감독의 인생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이창동 감독은 원래 소설가였다고 들었는데, 이 영화는 왠지 본인이 소설가가 되기 위해 겪어왔던 과정들을 그린 것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해미와 벤의 존재는 작중에서는 사람으로 묘사되었지만 실은 다른 것을 상징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해미는 작가가 느끼는 막연한 결핍이나 분명히 스스로 느끼고 있지만 아직 확실한 언어나 표현으로 잡히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작중 해미는 말이 많고 감정적이며 즉흥적이고 설명하기 힘들다. 이는 초기 작가가 붙잡고 있는 쓰고 싶은 무언가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반면 벤은 여유 있고, 자신에 대한 확신과 사회적 인증을 얻은 위치다. 이를 작가의 세계로 비유하면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 대세가 된 담론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벤은 해미를 소비하고 필요없으면 교체한다. 벤은 자본, 제도, 권력과 같은 것들을 닮아있다. 종수는 작가 자신을 의미한다. 무언거 쓰고 싶은 감각적인 해미를 잡고 싶지만, 제도를 상징하는 벤에게 그녀를 빼앗기고 분노하고 의심하며 방황한다. 영화 후반부에 종수는 해미를 되찾지도 못하고, 벤을 고발하지도 못하고, 세상을 바꾸지도 못한다.
작중에서 벤이 종수에게 어떤 소설을 쓰고 싶냐고 묻자 종수는 "어떤 소설을 써야할지 모르겠어요. 저에게는 세상이 너무 수수께끼 같아요"라고 말한다. 종수는 스스로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지만 아직 소설을 쓸수 없는 상태다 그에게 세상은 수수께끼라 어디를 붙잡아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수는 후반부에 글을 쓰기 시작하는데, 종수는 세상을 다 이해했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답을 구하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써야하는 상태에 도달함으로써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지 못해도 질문을 안고 글을 쓰는 것이다.
이 영화는 일반적인 스릴러나 공포영화와는 달리 깜짝 놀래키는 장면도 없고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장면도 안나온다. 알수없는 긴장감이 이어지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마음이 조여온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 속에 불안한 감정이 들었다. 물론 감독이 이 지점을 노렸겟지만 나는 영화를 보면서 느낀 꿈을 쫓아 현실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상에서 이런 감정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장 먹고 살기 위해 물류센터에서 일을 하면서 남는 시간에는 글을 쓰지만 글을 출간한다고 해서 잘될지 안될지 모르는 그 불안한 감정. 영화는 바로 그 감정을 스토리를 통해 느끼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놀랍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꿈과 현실을 이야기하는게 아니라 싸이코패스 같은 캐릭터와 살인과 같은 메타포를 활용해서 말이다.
벤은 자신이 신이라도 된것처럼 말하지만 그는 리틀 헝거를 의미한다. 벤은 자신이 우습게 소비하는 해미나 다른 물건들과 큰 차이가 없다. 벤은 넓은 집과 비싼 차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조차 소모품일뿐, 벤이라는 사람의 내면의 정체성을 알 수 있는 요소는 영화 그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좋은 집과 차에 자아의탁해서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하지만 벤이라는 사람은 이 사회에 있으나 없으나 크게 영향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벤은 무언가를 창조하지 않고, 의미를 만드는 것도 아니며 오직 소비만 한다.
해미는 초반에 종수를 만나자마자 "작가 이종수"라고 불러준다. 해미는 그레이드 헝거이자 종수의 내면의 목소리 메타포이다. 종수는 해미에게 판토마임 잘한다며, 재능있네라고 하는데 해미는 "이건 재능으로 하는게 아니야, 여기에 귤이 없다는걸 잊어먹으면 되는데, 중요한건 진짜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면 진짜 입에서 침이 나오고 맛있어."라고 하는데 이거 마치 소설가가 되고 싶은 종수에게 소설은 재능으로 하는게 아니라고 말하는것 같다. 재능은 외부 기준이고, 기술은 평가 가능한 것이며, 흔히 성공이라 말하는건 대부분 결과 중심이다. 해미는 그런 것들을 전부 밀어내고 결핍을 스스로 느끼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고 말한다. 글을 쓰는 작가의 가장 원초적인 상태가 아닐까 싶다.
해미의 판토마임 장면은 해미가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종수에게 하는 말이다. 종수가 해미에게 "재능있네"라며 남의 세계 인것처럼 평가하지만 해미는 재능이 아니라고 말한다. 나는 이 장면이 마치 종수가 "나는 소설에 재능이 있을까?"라고 물었는데, 해미가 "재능은 중요하지 않아"라고 대답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해미는 귤을 진짜 먹고 싶다고 생각하면 침이 나온다고 말한다. 이를 소설 작가에 비유하면 잘써야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이 아니라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이런 상태가 되면 문장이 어설퍼도 계속 쓰게 되고, 결과가 불확실해도 스스로 멈출 수가 없다. 나는 이것이 그레이트 헝거라고 생각한다.
해미는 작중에서 직접적인 설명보다 감각, 논리보다 직관, 물질적 성공보다는 갈망을 추구한다. "나는 이렇게 몸쓰는 일이 좋아"라며 자신이 좋아하는걸 명확히 알고 있고, 판토마음을 재미로 배웠다고 하면서 , 자신이 귤을 먹고 싶을때 언제든 먹을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내면의 갈망은 오래가기 힘들다. 실제로 해미도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보호 받지도 못하고 늘 불안하다가 마지막에는 사라진다. 소설가에 대한 갈망도 마찬가지다. 나는 재능이 없어서 못쓰고, 환경이 안좋아서 못쓰고, 지금은 때가 아니라서 못쓴다고 핑계대면 내 소설에 대한 갈망은 금방 사라진다.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꿈을 쫓고 싶냐고 물어본다.
해미는 종수에게 그레이트 헝거 이야기를 하자마자 부탁이 있다며, 자신이 아프리카로 갔을 때 고양이에게 밥을 주라고 부탁하는데, 이때 고양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종수의 내면의 목소리, 그러니까 소설가가 되고 싶은 그레이트 헝거가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에게 밥을 주라는건 무슨 의미일까?
작중 고양이 보일이는 소설가가 되고 싶은 마음의 메타포이다. 고양이에게 밥을 준다는 표현이 중요한데, 고양이를 키우라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밥을 준다는 매일 챙기고, 결과가 없어도 반복하고, 아무도 인정하지 않아도 계속하라는 의미이다. 소설가로 비유하면 매일 글쓰는 시간을 확보해서 하루에 한 문장씩이라도 쓰기와 같다. 엄청난 결과를 내라는게 아니라 매일 밥을 주면서 자신의 욕망을 유지하라는 뜻이다. 종수는 고양이를 실제로 본적이 없는데도 밥을 주고 물을 준다. 즉, 고양이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어도 믿고 행동하는 것이다. 소설가가 된다는건, 자신에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성공할지도 모르고, 인정받을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쓰는 것이다. 보일은 영어로 boil, 끓는다는 뜻이다. 겉으로는 조용해보이지만 주전자 안에서는 끓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마치 종수 내면에 끓고 있는 소설가에 대한 욕망처럼 말이다.
종수는 해미와 함께 그녀의 집에 가면서 지금 집에 문제가 생겨서 파주 집에가고 있다며, 누나는 결혼했고, 엄마는 집나갔고 아버지는 문제가 생겼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말을 들은 해미는 놀라지도 않고 문제는 항상 있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나는 이 장면을 어떻게 봤냐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당연히 나를 둘러싼 외부에서 많은 문제들이 생길 수 있지만 그런 문제들은 꿈을 이루는데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것 같다고 느꼈다. 종수가 말한 문제들을 꿈과 연결지어 생각해보면 지금 나는 무언가 하기에 조건이 안된다고 말하는 듯 느껴지는데, 해미가 문제는 항상 존재한다며 문제라는 것 자체가 삶의 전제조건이다. 문제가 없어서 시작하는게 아니라 문제가 있는 상태에서 그냥 하는게 기본값인 것이다. 이 장면에서 감독의 꿈을 대하는 태도를 엿볼수 있었다.
종수는 고양이 보일이가 보이지 않자 해미에게 보일이도 혹시 상상속의 동물 아니냐며 묻는데, 이 말은 사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마치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자신의 마음도 내가 만든 상상아닐까라며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종수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스스로의 확신도 없는 불안한 상태임을 보여준다. 종수는 이어서 말한다 "내가 고양이가 없다는걸 잊어버리면 돼?" 내 생각에 이 대사는 자신의 마음에 소설가라는 꿈이 없다는걸 잊어버리면 되냐며, 이게 허상일수도 있다는걸 모른척해도 될까? 라고 자신의 내면에 물어보는것 같이 느껴진다. 그리고 다음 장면의 종수와 해미의 성관계는 종수가 자신의 내면을 마주한 장면이라고 보면 될것 같다. 자신의 소설가에 대한 욕망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해미는 자신의 집이 북향이라 하루에 빛이 딱 한번 들어온다고 말하는데 이는 자신이 어디를 향해 살아야할지 분명해지는 순간은 늘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종수는 파주에 있는 아버지의 집에가서 송아지에게 여물을 주고, 자신도 밥을 먹는데 TV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근로자들에게는 최고의 대우를 받게 할 것입니다" 이 장면은 현실에 적응하고, 순응하면 너도 보호받을 수 있고 안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수가 꿈을 포기하고 현실에 맞춰살게 되는 시나리오를 표현한것 같다.
종수가 창고에서 벽 액자에 숨겨져있는 고급 칼을 보게 되는데 여기서 칼은 무슨 의미일까? 단순히 후반부에 벤을 죽이기 위한 도구가 있다는걸 보여주는걸까 아니면 칼에 또다른 의미가 있는걸까? 종수가 꿈을 접고 현실에 순응하고 조용히 산다고해서 내면의 열망, 세상에 대한 질문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안에서 썩고 언젠가 다른 방식으로 터질 확률이 높다.
종수의 아버지는 꿈을 외면하고 현실을 따라갔을 때를 나타내는 메타포이다. 겉보기에는 농사일을 하며 평범하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살다가 그게 결국 잘못된 방향으로 분출된 것처럼 보인다. 종수의 아버지는 폭력적이고 늘 화가 나있으며 사회와 계속 충돌한다. 만약 종수도 소설가가 되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살았으면 그렇게 됬을 지도 모른다. 종수 아버지인 변호사 친구가 실제로 종수 아버지는 자존심하나는 1등이었다고 하는데, 아마 그 성격이 더욱 꿈을 쫓아가지 못한 원인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반대로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꿈만 쫓다가 실패한 케이스를 보여주던가 말이다.
아버지 친구 변호사는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종수에게 파란만장한 삶은 산 아버지를 주제로 글을 써보라고 추천하지만 정작 종수가 쓴 건 아버지의 탄원서였다. 그리고 탄원서의 사인을 받기 위해 간 농장 주인 아저씨에게 글을 잘쓴다는 칭찬을 받는다. 어쩌면 이 장면은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글을 쓰는게 아니라 유행과 같은 외부 요인으로 인해 글을 쓰면 칭찬을 받을 수 있겠지만 내 마음은 채워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출판시장 기준으로 합리적이고 팔릴만한 글을 쓰는건 실제로도 많이 통하는 조언이다. 하지만 종수 아버지 이야기는 종수의 욕망도 아니고, 이해하지도 못한 삶이라 내가 정말 쓰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 써도 되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래서 그가 아버지에 대해 쓴 것은 소설이 아니라 탄원서이다. 탄원서는 감정을 절제하고 논리를 맞추고 설득을 목표로 하는, 형량을 낮추기 위한 수단이 되는 글이다. 그렇게 쓴 글로 농장 아저씨에게 칭찬을 받지만 공허할 뿐이다. 탄원서라는 글을 통해서는 종수의 내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채 글을 쓰는 기술, 즉, 기능을 칭찬한 것이다. 이런 말로는 그의 마음을 채울 수 없다.
물론 이 장면은 종수가 제도권 안에서 글을 써서 인정받을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다. 즉, 리틀 헝거 기준으로는 합격인 셈이다. 그러넫 술자리에서 벤은 종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써달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벤의 제안은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이자 사람들에게 관심 받을 수 있는 이야기, 팔릴 만한 서사를 쓰라는 말과 같다. 벤은 종수에게 작가로서의 성공에 가장 빠른 길을 제안한 것인데, 아이러니하게 종수는 벤을 죽여버린다. 아마 종수는 무차별적인 재정적 성공만을 인생의 목표로 살진 않겠다는 의미가 아닐까.
벤은 종수에게 자신은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겉보기에는 사회적으로 사라져도 모를 무관심한 사람들을 죽인다라고 해석할수도 있지만, 조금더 생각해보자. 벤이 해미를 죽였다고 생각해보면 해미는 종수의 내면의 목소리에 해당하므로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다고 한건 내면의 목소리, 갈망, 쓰고 싶은 마음을 죽이는게 취미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리틀헝거처럼 돈만 많이 벌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죽이며 사는 삶을 비닐 하우스를 태운다고 말한건 아니었을까? 그런 건 나중에 해도 된다며, 일단 돈부터 벌라며, 현실적으로 생각하라며 리틀 헝거가 그레이트 헝거를 죽이는 것이다.
종수는 벤과 떠나려는 해미에게 "창녀나 그렇게 옷을 벗는거야"라고 말한다. 이 장면은 해미를 지키지 못하는 자신을 두고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욕망은 스스로 더럽다고 생각해버리는 장면과 같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모욕하는 방식으로 내면의 목소리를 죽이려 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이 불에 타는 비닐하우스를 보면서 웃는 어린 종수가 나온다. 이때 어린 종수의 웃음은 내면을 죽이면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까 이렇게 편하다는걸 느끼는, 벤과 같이 잠시나마 리틀헝거가 된 순간 아니었을까?
이렇게 리틀헝거가 된 듯한 종수였지만, 그 다음장면이 바로 물류센터에서 3번이 되기를 거부한 장면이다. 리틀헝거가 된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내면을 완전히 죽이지는 못한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확인한 종수는 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그의 집에 갔다가도 이젠 할말 없다고 돌아선다. 내 생각에는 벤의 집에서 새로운 여자친구가 해미와 같은 취급을 받는것을 보면서 종수는 벤, 그러니까 리틀헝거에게 학을 떼고 선을 그은 것처럼 보였다.
종수는 이후 눈빛이 변하면서 해미의 집에서 창밖의 남산타워를 보며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데 이부분이 드디어 소설가로서의 각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내 생각에 종수가 해미의 집에서 노트북으로 소설쓰면서 영화가 끝나도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그 이후에 벤이 새로운 여자친구 화장시켜주는 장면이 나오고 종수가 벤을 실제로 죽이고 자동차를 태워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럼 종수가 소설쓰는 장면 이후의 장면은 소설이라고 봐야할지 아니면 진짜 영화에서 실제 스토리의 일부일지 궁금해지는데, 물론 감독은 이렇게 두가지고 해석되는것을 노렸을것 같다. 종수는 이미 벤을 마음속에서 떠나보냈는데 굳이 실제로 죽일 필요가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