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점, 학계, 그리고 박사 이후의 세계
취업난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내가 대학교를 다니던 10여년 전부터 이미 취업난이었는데, 그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는 느낌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AI의 등장으로 가뜩이나 좁았던 취업문이 더욱 좁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출산율 저하로 인한 학과통폐합도 함께 진행되는 가운데, 대학교육의 의미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간다. 취업이 잘 되지 않아 대학원 진학을 생각하고 상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오늘은 그와 관련해 사람들이 잘 이야기 하지 않는 내용을 말해보려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대학 졸업 후 기업에 취업을 하는 모습을 보다보면, 대학과 회사가 굉장히 관련되어 있어보인다. 하지만 잘 보면 대학과 기업은 생각보다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애초에 대학이 속하는 곳은 학계이고 기업이 속한 곳은 산업계이므로 그 소속분야부터 명확히 다르다. 애초에 출발점부터 다른 것이다.
흔히 취업스펙으로 학점이 높으면 성실성과 전공지식을 어필할 수 있다고 알려져있지만, 실제로는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실무에 그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직접적인 연관성이 높다고 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대학교 학점은 무슨 의미일까?
학점은 회사같은 산업계에서의 성공 가능성 보다는 대학원 같은 학계에서 더 잘할 수 있는지 여부를 알려주는 수치에 가깝다. 시험 잘보고, 과제 잘하고, 정해진 평가 기준에 맞춰 성과를 내는 능력은 이 사람이 학계의 룰안에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인 것이다. 즉, 학부 학점이 좋다는 것은 교수 입장에서 학계라는 체제에 얼마나 순응하는지 알수있고, 그 사람이 대학원에 진학해서 논문 시스템에 투입되었을 때 제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학점이 좋은 사람들은 대학원을 고려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산업계는 전혀 다른 능력을 요구한다. 문제 정의조차 힘든 불확실한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 돈이 되는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요구한다. 제한된 시간, 자원, 사람 사이에서 이정도면 팔 수 있거나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필요한데, 이러한 역량은 학점과 상관관계가 낮을 수 밖에 없다. 오히려 산업계측면에서 볼때 학점은 평범하지만 시행착오를 많이 겪고 현실 문제에 부딪혀본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산업계에서 더 잘 성장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래서 취업을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대학원 졸업 후 생각보다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는 경우도 많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학점은 구성원들 사이에서 누가 학계 루트에 적합한지를 가르는 내부 랭킹 시스템에 가깝다. 동일한 커리큘럼, 동일한 시험, 동일한 교수 아래에서 누가 더 학계 룰에 적응했는지를 순위로 매기는 것이다. 그래서 학점이 낮은 사람은 스스로 학계 체질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취업 루트를 선택하고, 학점이 높은 사람은 학계라는 시스템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대학원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개념은 서울대든 지방대든 크게 다르지 않다.
흥미로운 점은 최상위권 대학에서도 이 내부 경쟁이 한 번 더 작동한다는 것이다. 물론 서울대에서 하위권이라도 전국 기준으로는 상위권일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부 경쟁에서는 하위권이라는 이유로 상당수는 대학원 진학보다는 산업계를 선택한다. 최상위권 대학에서 조차 자체 내부 경쟁을 통해 학계 진입 인원을 한번 더 추리는 것이다. 여기까지 봤을 때는 나름 잘 작동하는 시스템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제가 될 수 있는 상황은 상위권 대학이 아닌 대학에서 내부 경쟁을 통해 1등하고 자신을 연구 체질이라고 착각하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 절대적 기준이 아닌, 상대적으로 상위권이기 때문에 대학원에 진학하면 그 보호막이 사라진다. 이 상태로 대학원에 진학하면 해외 명문대 출신들과 같은 링에서 만나게 되면서 노력 대비 결과가 안나오면서 자존감이 깎이며 자책하는 경우가 생긴다. 더 어려운 점은 이런 애매한 상태가 오래 지속되기 쉽다는 것이다. 물론 절대적으로 상위권이 아니라도, 많은 노력끝에 뒤늦게 재능이 피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재능이 없더라도 대학원 과정 자체는 의지와 인내만 있으면 무사히 마칠 가능성이 높고, 경우에 따라서는 유학도 가능하다. 하지만 문제는 학위를 취득한 다음이다.
학계라는 곳은 피라미드 구조가 명확하다. 그 꼭대기에는 자기 분야를 끝까지 밀어붙이며 영향력 있는 논문을 쓰는 극소수의 연구자들이다. 이들은 실제로 학문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반면 그 아래에는 박사 학위도 있고, 연구도 하긴 하지만 주목받기 어려운 연구를 지속하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의 논문은 널리 읽히지 않고, 후속 연구로 이어지지 않으며 스스로도 그 사실을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연구소라는 이름의 완충지대에 취업하는 경우가 많다. 국가 입장에서는 애매한 박사들을 전부 사회에 방출하면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고 그렇다고 모두에게 교수 자리를 제공할 수도 없다. 그래서 연구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공간을 만들어 흡수하는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박사학위를 따고 연구소에 취업해서 근무하는 것으로 멀쩡해보이지만, 실제로는 연구의 성과가 누적되지도 않고, 산업에도, 학계에도 큰 영향을 남기지 못한채, 시간이 지나도 본인 이름으로 남는게 없는 경우가 생긴다.
그럼에도 사람은 자신의 선택과 시간을 정당화하며 살아간다. 박사 학위라는 성취를 붙잡고 언젠가는 의미 있는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 속에서 버텨나간다. 그 선택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건 박사학위 자체와 의미있는 연구자는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분명 박사학위 자체는 성취일 수 있지만, 의미있는 연구를 수행하는 사람은 박사 중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씁쓸한 점은 이러한 구조를 대학원에 들어가기 전에는 아무도 솔직하게 말해주지 않는 다는 것이다. 당신이 대학원 상담을 받아본적이 있다면 아무도 이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러한 현실을 알고 선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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