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숨, 그리고 모순

by 천세아

세상에 눈을 뜨기 전부터, 나는 이미 슬픔을 품고 있었다.

엄마는 나를 임신한 채 폐혈관의 혈압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지는 병을 앓고 있음을 알게 됐다. 당시에는 치료법도, 병을 아는 의사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진단과 동시에 시한부 선고를 받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병'이라 불리던 희귀 난치성 질환, 폐동맥고혈압.

산모의 목숨마저 위태롭다며, 의료진은 한 목소리로 출산을 만류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엄마는 기어이 나를 세상에 내보냈다. 나는 8개월을 채우지 못한 채, 2kg도 안 되는 이른둥이로 첫 숨을 쉬었다. 할머니는 내가 얼마 버티지 못할 거란 생각에 엄마와 내가 병원을 나서는 날까지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으셨다. 그 선택의 무게는 엄마를 시켜 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다.


"나는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환자다. 그러니 엄마 말 잘 듣고 스트레스받게 하지 마. 죽고 나서 후회해도 아무 소용없다."


1986년 그렇게 나의 삶은 시작되었다.

역경과 고난이 예고된 한 권의 이야기처럼.

엄마의 그 말은 어린 나에게 너무도 혹독했다. 내가 엄마를 힘들게 하는 원인이라고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안다. 그건 나에게 주어진 매일을 허투루 살지 말라는 엄마의 아픈 사랑이자, 간절한 가르침이었다는 것을.
덕분에 나는 오늘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믿는다.


어린 시절, 경제적인 사정이나 집안 분위기는 늘 파도 위에 얹혀 가듯 오르락내리락했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 나는 나름 예쁨 받던 외동딸이었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는 덕에 3살 즈음 집으로 선생님이 오셨고 4살 무렵에 한글을 읽었다.

외할아버지는 그런 나를 데리고 다니시며 어르신들이 모여있는 곳에 가면 괜한 질문을 던지셨다.


"이 글자 한번 읽어봐라."


그렇게 동네 어르신들의 부러움을 한껏 누리신 뒤에는 집으로 돌아와 친조카들 모르게 냉동실 구석에 숨겨놓은 초콜릿을 꺼내 주셨다.

성품이 자애로우셨던 외할머니 역시 나를 유독 많이 아끼셨다. 토끼 잠자는 손녀를 위해 옆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고 부채질을 해주시느라 새벽에 주무시는 날이 허다했다.

엄마는 나의 영리함을 자랑스러워했고, 아빠는 일 때문에 함께하지 못하는 시간의 공백을 물질로 채워주었다.


내가 기억하는 불행의 시작은 대여섯 살 무렵이었다. 그날은 처음으로 경찰서에 발을 들인 날이기도 하다. 당시 엄마는 동네에서 작은 슈퍼를 운영하셨는데, 의심과 망상이 심했던 아빠는 엄마가 남자 손님에게 조금만 친절해도 '바람을 피운다'거나 '남자와 친하다'며 큰 소란을 피웠다. 그런 일은 평소에도 자주 있었고, 대개는 심한 말다툼으로 끝났다. 그런데 그날은 무언가 달랐다.

내 눈앞에는 스스로 배를 칼로 그어 검붉은 피로 뒤덮인 아빠, 가슴을 부여잡고 급히 119를 부르던 엄마, 그리고 그 옆엔 자식을 걱정하며 울부짖던 외할머니가 있었다. 나는 그 비현실적인 광경 속에서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지 못한 채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경찰서에 도착해 경찰관의 질문에 겨우 대답을 마치자, 구급차에 실려 간 엄마가 비로소 걱정되기 시작했다. 엄마를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칠 줄 모르고 울었던 그 기억은 서른 해를 훨씬 넘긴 지금도 여전히 생생하다.

진술을 마친 경찰관은 내 엄지손가락에 인주를 묻혀 어떤 종이에 꾹꾹 눌러 찍게 했다. 배에 붕대를 감고 수갑을 차고 있던 아빠가 멀리서 소리치며 난동을 부렸다.


"내 새끼 손에 감히 인주를 묻혀?"


나는 지금도 아빠의 그 모순된 모습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아빠는 나와 함께 사는 동안 나에게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거나 해코지한 적은 없었다. 어머니에게는 최악의 남편이었지만, 나에게는 최고의 아빠가 되고 싶어 했던 아버지는 이미 모순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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