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 나는 ‘이혼’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매일 밤낮으로 이어지던 부모님의 싸움 속에서 지겹도록 듣던 그 단어.
월미도 유람선에서 요리를 즐기고, 즉석 사진을 찍으며 단란한 가족을 가장했던 그날도 그랬다. 사소한 말로 시작된 다툼 끝에는 다 같이 죽자고 소리치며 난폭운전을 하는 아빠와 기도하듯 두 눈을 꼭 감고 이혼을 읊어대는 엄마가 있었다.
지금이 행복한 건지 불행한 건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늘 불안했던 나는 눈치를 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혹여 나 때문에 부모님의 싸움이 커질까 봐 필사적으로 착한 딸, 행복한 딸을 연기했다.
마음속으로는 차라리 두 사람이 헤어져 이 고통이 하루빨리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무당이었던 외할머니가 외삼촌 내외와 함께 살던 그때는 내가 예닐곱 살쯤 됐을 때다. 그 집엔 딸이 셋 있었는데, 내 위로 언니 한 명, 나와 동갑내기 한 명, 그리고 갓난쟁이 한 명이었다. 부모님이 일을 하는 동안 종종 외할머니 댁에 맡겨졌던 나는 외숙모의 날 선 눈치를 견디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맛있는 음식을 본인 아이들에게만 먹게 하는 것 정도는 참을 만했다. 내가 밥을 느리게 먹는 탓에 밥상을 빨리 물리지 못하면, 상 밑으로 내 허벅지를 꼬집는 손길도 힘겨웠지만, 그래도 배부른 척 수저를 내려놓으면 되었기에 견딜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루는 그 집 아이들과 집안에서 잡기 놀이를 하다 외숙모가 의자 위에 개어놓은 빨래가 엎어졌다. 내가 혼자 저지른 일도 아니었고, 아이 셋이 신나게 놀다 보니 생긴 일이었다. 보통의 가정이라면 집에서 뛰지 말라고 꾸중을 듣고 잡기 놀이를 멈춰야 했을 정도의 일. 그러나 나는 그 일로 머리채를 잡혀 화장실까지 질질 끌려갔고, 그것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외숙모는 슬리퍼 신은 발로 나를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가정폭력은 늘 봐왔던 풍경이었지만, 내가 직접적인 대상이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순간, 나는 진짜 '죽음'이라는 공포를 온몸으로 경험했다. 초등학교 1~2학년쯤 되었을 사촌 언니가 울고 불며 외숙모를 말린 덕분에, 나는 그 끔찍한 공포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그전까지의 괴롭힘은 단 한 번도 집에 이야기한 적 없었다. 아빠 성격도 만만치 않았고 외삼촌 역시 보통 인물이 아니었기에, 외숙모가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겁이 났었다. 그런데 그간의 걱정은 기우였을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평소 자기 아내에게 막말을 일삼고 함부로 대하던 외삼촌이, 내 일로 따지러 온 엄마, 그러니까 본인의 누나를 나와 외할머니가 보는 앞에서 발로 짓밟았다. 나는 그날 또다시 엄마가 응급실에 실려 가는 것을 울며 지켜봐야 했다.
어린 조카에게 죽음의 공포를 안겨준 외숙모. 하지만 폭력으로 점철된 그녀의 삶 역시 위태로웠을지도 모른다. 그 불행이 자신 안에서 맴돌지 못하고 결국 가장 약한 곳으로 흘러넘쳤을 때, 나는 그 분출의 대상이 되었다.
그 후, 외할머니는 신당을 우리 집으로 옮기셨다. 그 일 때문은 아니었지만, 고부갈등이 큰 이유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쨌든 외할머니는 그렇게 우리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문제는 아빠가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이었다. 아빠는 스스로 모태 신앙이라 했지만, 내가 아는 기독교의 교리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 사람이었고, 딱히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사람도 아니었다. 아빠는 집 안에 신당을 차린 외할머니 때문에 본인 사업이 어려워졌다는 핑계, 그리고 결혼 전 외할머니가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다는 과거를 들먹이며 걸핏하면 엄마에게 시비를 걸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외할머니 앞에서는 직접적인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지금 짐작하건대 아마도 할머니가 신고할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 평화마저 오래가지 못했다. 우리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방패막이가 되어주던 외할머니가 오랜 기간 앓던 간경화로 돌아가셨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빠의 사업으로 인한 빚을 핑계로 엄마는 아빠를 설득해 위장 이혼(을 가장한 이혼)을 했다. 그리고 이혼이 확정되던 날 밤, 우리는 최소한의 짐만 싸 들고 집을 뛰쳐나왔다. 말 그대로 야반도주였다.
나는 이제 엄마와 나, 둘이서만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엄마는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 식구는 우리 둘이 아니라 넷이라고. 사실 나에게 오빠가 둘이나 있었다는 사실… 이제 와 생각하면 이 정도 일은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지만, 당시엔 부모님의 이혼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