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아빠가 재혼이었다. 첫 번째 결혼은 모진 시집살이와 끔찍한 폭력에 지쳐 이혼했고, 세 살과 다섯 살의 어린 아들들을 남겨둔 채 간신히 빠져나왔다고 했다. 그 후 지금의 아빠와 결혼해 나를 낳았고, 그 모든 사실은 나에게 철저히 숨겨져 있었다.
그렇게 십여 년 만에 엄마는 흩어졌던 두 아들을 찾아냈다. 오랜 세월의 이별에 비하면 재회는 의외로 순조로웠다. 전 남편과는 꾸준히 연락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오빠들을 처음 본 날, 나는 겨우 아홉 살이었다. 큰오빠는 열아홉, 작은오빠는 열일곱. 둘 다 중학교 졸업도 하지 못한 채 중국집 배달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오빠들의 아버지 되는 사람은 엄마와 이혼 후 곧바로 재혼했고, 새로 얻은 아이에게 모든 지원을 쏟아붓는 바람에 두 오빠는 사실상 버려진 상태였다. 그러니 아들들을 마주한 엄마의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엄마는 주저 없이 두 오빠를 집으로 불렀다. 하지만 작은오빠는 서울에 있는 본집이 더 나은 것 같다며 돌아갔고, 큰오빠는 그때부터 우리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나의 인생이 지옥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큰오빠와 엄마, 나, 이렇게 셋이 살게 되면서 엄마는 큰오빠의 눈치를 살폈다. 함께하지 못한 어린 시절에 대한 죄책감이 더욱 무겁게 다가왔을 것이다. 오빠는 엄마를 이해한다고 말하면서도, 때때로 억울함과 원망이 솟구치는 듯했다. 어떤 날은 매우 다정하다가도, 어떤 날은 술에 취해 엄마에게 욕설을 퍼붓고, 나중에는 폭력까지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빠의 가정 폭력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은 채 1년도 되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오빠의 폭력이 아니었다. 그런 오빠를 미워하지 못하도록 나를 조종하던 어머니의 태도였다. 그랬던 것 같다.
엄마와 오빠, 나. 우리는 셋이서 수없이 '도피'에 가까운 이사를 다녔다. 아마도 밀린 집세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빠와 헤어지기 전, 나는 화장실 두 개 딸린 넓은 집에 나만의 방이 있었다. 나에게 그건 당연했다. 이별 후에는 내 방이 사라졌다, 인형 선물도 더 이상 없었다. 그것이 나의 짐작을 굳혔다. 어머니는 그 무렵부터 지병이 악화되어 몸을 가누기 힘들어했다. 큰오빠가 중국집 배달로 벌어오는 돈이 유일한 수입원이 되었다.
그날도 그렇게, 도망치듯 짐을 쌌다. 1톤 트럭 좁은 자리에 세 식구가 어깨를 맞대고 앉아 있던 시간이 유독 길게 느껴지던 날. 몇 시간을 달렸을까. 칠흑 같은 밤을 지나 검푸른 새벽녘, 트럭이 멈춰 선 곳은 태어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땅, 충남 서산이었다.
세월의 강을 건너 만난 오빠와 엄마. 그들 각자의 상처는 너무 깊었다. 엄마의 죄책감은 오빠에게 덮어두었던 마음의 빚을 돌려주듯, 또 다른 아픔을 불러왔다. 오빠의 폭력이 나에게 표면의 상처였다면, 엄마의 가스라이팅은 영혼을 좀먹는 고통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가장 가까운 이가 감정을 부정하는 것만큼 잔혹한 일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를 미워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 심리를, 이제는 아픈 경험으로 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