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가

by 천세아

충남 서산에서도 거의 한 시간을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하는 '대죽리'. 그곳에 우리가 살 집이 있었다.

웬만한 일에는 이골이 나서 잘 놀라지도, 슬퍼하지도 않던 나에게도 그 집의 첫인상은 충격, 그 자체였다. 집이라기엔 민망한, 말 그대로 수풀 속에 버려진 폐가. 마당에 무성히 자라난 잡초는 내 키보다 컸고, 지붕만 겨우 얹혀 있을 뿐 문도, 창도 다 부서져 있었다. 온갖 쓰레기와 오물이 가득한 곳. 그곳이 서산에서 우리가 마주한 첫 집이었다.

화장실은 시대극에나 나올 법한 재래식이었다. 볼일을 볼일고 화장실 문을 열면 발아래에서 벌레들이 '샤샤샤' 하고 흩어지는 소리에 머리가 쭈뼛 섰다. 벌레 떼도 문제였지만, 발판이 얼마나 부실하던지 자칫 잘못하면 똥통에 빠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어린 나는 제때 화장실을 가지 못했고, 새벽에 응급실에 실려 가 관장을 해야 했던 날도 있었다. 그런 집을 어떻게든 임시로 수리해서 1년 정도 살다가, 그 뒤로 거의 1년에 한 번씩, 때로는 몇 개월에 한 번씩 그 동네 안에서 비슷한 상태의 집을 찾아 이사를 다녔다. 작은 외삼촌네 가족도 그 무렵 같은 서산에 살고 있었다. 우리가 먼저 정착했는지, 아니면 삼촌네가 먼저 와 있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나는 심장장애 2급인 엄마와 주폭을 일삼는 큰오빠, 엄마를 수시로 괴롭게 하는 외삼촌, 나를 미워하는 외숙모, 그리고 어느새 여섯 남매가 된 사촌들과 함께 서산에서의 삶에 조금씩 적응해가고 있었다.

내가 열세 살 되었을 때, 우리는 드디어 서산 시내로 이사를 나왔다.

그전까지 큰오빠는 중국집 배달을 했지만, 시내로 나오면서 일을 그만두고 당시 서산에 유일했던 유흥거리 한켠에서 어머니와 함께 포장마차 일을 시작했다. 트럭에서 김밥, 떡볶이, 어묵 등을 팔았다. 낮에는 재료 준비를 하고, 내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쯤 준비한 재료들을 트럭에 싣고 엄마와 오빠 둘이 함께 일을 하러 나갔다.

그러면 나는 동네 슈퍼에서 외상 장부를 적고 감자깡 하나와 베지밀 한 병을 사서 집에 돌아와 TV를 보거나 빈 종이에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당시 내 꿈은 패션 디자이너였다.


해 뜰 무렵이면 퇴근한 어머니가 나를 깨워주셨다. 어머니가 남겨온 김밥 몇 알을 주워 먹으며 학교 갈 준비를 했다. 그런 아침이 익숙해질 때쯤, 나는 몇 가지 큰 사건을 겪게 되고, 그 뒤로는 나 역시 포장마차 트럭을 타고 함께 나가 조수석에서 잠들고 함께 퇴근하게 되었다. 그 사건 중 하나는 외삼촌이 내가 다니던 학교에 와서 나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던 일이다.

당시 집이라는 공간은 나에게 늘 경계와 불안의 대상이었다. 수풀 속 폐가는 어린 날의 나에게는 혹독한 삶의 시험대였지만, 동시에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는 방법을 익히는 첫 교실이기도 했다.


이전 04화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