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흔과 사랑

by 천세아

이때부터였다. 가족들로 인해 힘들던 시간을 넘어, 나 스스로 내 삶의 고삐를 놓치기 시작한 듯했다.

나는 두 번 이혼했지만, 결혼식은 한 번도 올려본 적이 없다.

첫 번째 남편은 나보다 두 살 많았다. 큰엄마 댁에서 나온 지 몇 년 후였다. 당시 나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작은 원룸과 안정적인 직장을 얻었다. 큼직한 빚을 다 갚은 그때는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풍요로운 시기였을 것이다. 힘들던 마음도 어느 정도 정리되어 있었다. 그러다 문득 취미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저것 시도하다 볼링에 빠졌다. 살던 원룸 근처 볼링장 모임에도 나갔다.

나는 외향적이었고, 눈만 마주치면 누구 와든 친해지려 들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내가 어떤 노력을 해도 목석처럼 무표정했다. 웃음도 말도 없었다. 미혼 남녀가 모이는 자리에서 흔히 오가는 은근한 시선 교환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뒤풀이에는 늘 꾸역꾸역 따라왔다. 술도 마시지 않으면서.

참 흔치 않은 인물이라 여기며 지내다 계절이 바뀌었다. 볼링 모임은 여전히 활발했고, 어느 날 모임 후 식사에 갈 사람을 찾는데, 그 사람과 나만 손을 들었다. 당연히 안 올 줄 알았는데, 둘이서 가자고 했다. 독특했지만 착한 사람이었다. 술 한 잔 마시지 못하고, 화도 낼 줄 모르는, 나와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딱 하나 너무 닮은 점이 있다면, 둘 다 부모의 사랑에 목말라 있었다는 것. 우리는 서로의 결핍을 마치 운명처럼 느꼈다. 남들이 들으면 기괴하다고 여길지도 모르는 이야기였지만. 불우한 가정사 때문에 일찌감치 결혼을 포기하고 연애조차 시도하지 않았던 '모태 솔로'. 그가 내 첫 번째 남편이었다.

첫 번째 결혼 생활을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남(他人)'이었다. '님(愛人)'이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던 것처럼, 우리는 끝까지 남이었다. 내 휴대전화에 저장된 번호는 4천 개를 넘어갔는데, 그의 전화에는 나 포함 다섯 개뿐이었다. 나는 여럿이 시끄럽게 노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는 조용히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겼다. 나는 '가족'을 원했지만, 그는 평생 함께할 '친구'를 원했다. 우리는 부모가 없다는 공통점 외에는 정말 너무나 달랐다. 철없고 무지했던 두 청춘이 손잡고 시청에 가서 쉽게 혼인신고를 했듯이, 이혼 또한 그렇게 허무할 만큼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것은 상처라기보다 경험이었다. 어차피 무엇이든 부딪히고 깨지면서 배우는 것이 내가 살아온 방식이었으니까. 이것도 그런 것 중 하나일 뿐이었다. 물론 그때는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좋은 사람이었고, 좋았던 때도 많았다. 시댁 어른들이 안 계시니 시집살이도 안 해도 되겠다고 다행이라 여겼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혼 과정에서 한쪽이라도 부모님이 계셨다면, 시부모님이라도 계셨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두 번째 결혼 역시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다. 덜컥 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혼인신고부터 했다. 아이 아빠는 다섯 살 연하였다. 시부모님은 멀리 경남에 사셨고, 두 분 모두 일을 하셔서 우리가 가끔 내려가야 뵐 수 있었다. 임신 기간 내내 입덧이 나를 괴롭혔다. 주위에 나를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남편뿐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늘 바빴다. 낮에는 일을 하느라, 밤에는 술을 마시느라 바빴다. 같이 마실 사람이 없으면 혼자서라도 마셨다. 당시 우리는 주방과 방 하나가 나뉜 1.5룸에서 지냈는데, 그즈음 시댁 식구 중 남편 형의 아내, 그러니까 '형님'과 연락을 주고받는 것이 하루의 낙이었다. 같은 집안 며느리라는 동질감, 각자 남편에게 터놓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하며 우리는 전우애를 키우듯 돈독해져 갔다. 나는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처음 대화는 선배 임산부로서의 조언과 걱정이 대부분이었지만, 자연스레 형님의 하소연으로 이어졌다. 나는 그때 뱃속 아이가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형님은 딸을 키우고 있었다. 거기서부터 은근히 드러나는 시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이나, 임신 당시 당신에게 실수했던 시부모님이 이제는 경험 삼아 나에게 조심하는 걸까 싶을 정도로 형님에게 듣는 이야기들은 내가 알던 시부모님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5년 전이었으니 코로나가 한창일 때였다. 멀리 계신 시부모님과는 연애 시절을 포함해 두어 번 정도 뵌 것이 다였기에, 형님을 통해 듣는 이야기에 나의 걱정은 커져만 갔다.

임신 기간 중 절반은 극심한 입덧으로 해골 같은 몰골을 하고 하루 종일 할 수 있는 거라곤 두 평 남짓한 거실 매트리스에 누워 남편이 퇴근해 집에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나에게 형님의 전화는 기쁨과 불편함을 동시에 주었다. 안 그래도 예민하고 불안감이 높은 성격인데, 앞으로 나의 결혼 생활이 한없이 불행할 것이라는 상상력이 발동했다. 가끔은 형님과 나눈 대화 중 걱정스러운 부분을 남편에게 묻기도 했는데, 남편은 형수가 원래 좀 '푼수' 같은 성격이라며 너무 귀담아들을 필요 없다고 달랬다. 형님과 둘이 나눈 이야기이니 들은 내색은 절대 하지 말라고 했지만, 당시 나의 행동은 분명 어리석었다.

임신 기간은 5년이 지난 지금도 다시는 상상하고 싶지 않다. 입덧은 물론 숨 쉬는 게 힘들어 누울 수도 없어서 8개월쯤부터는 거의 매일을 앉아서 잤다. 입덧은 수술실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됐다. 나는 매일 이렇게 힘든데, 아이 아빠는 하루가 멀다 하고 핑곗거리를 만들어 술을 마시는 것이 참 야속하고 서운했다. 끊는다는 담배도 번번이 들키더니 나중엔 감추지도 않았다. 그래도 술만 아니면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큰오빠에게 그렇게 오랜 시간을 겪어놓고도 나는 그랬다. 뱃속 아이 때문에, 그저 그렇다고 믿고 싶었다. 그 믿음에 금이 살짝 가는 일이 있었다. 하루는 술에 취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자기 고향에 친한 여자 친구도 마침 임신 중인데, 그 친구는 지금도 출퇴근하며 직장 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왜 나는 입덧이 심해서 일도 못하고 누워만 있어야 하는지, 자기 자신도 버겁고 나도 안타깝다고 했지만, 나는 그 안타까움에 나를 향한 몫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너무 서러워 그날은 자려고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 대성통곡을 했다. 그 사람은 술에 취해 내가 우는지도 모르고 코를 골아댔다. 지금도 그때 그 장면이 너무 선명한데, 당시 내 눈은 원망과 증오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만삭의 몸으로 이제 와 무를 수도 없는데 저런 민낯을 이제야 드러내다니. 괘씸했다.

원래 하던 일을 그만두고 갑자기 보험을 하겠다고 했다. 남편의 친구가 보험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면서. 친구 따라 서울까지 가서 일하겠다는 것을 겨우 뜯어말리고 절충안을 내놓았다. 서산에 있는 보험 회사를 찾아 면접을 보게 했다. 그가 공부하는 것을 돕겠다며 옆에서 같이 공부하고 시험도 함께 봐주고, 시험에 합격한 뒤에는 내 지인, 친구들까지 동원해 계약도 몇 건씩 도와줬다. 입덧이 조금 덜할 때는 만삭의 몸으로 전단지를 돌리며 그의 일을 도왔다. 내가 하던 디자인 일로도 시청에서 일을 수주받아 천만 원 가까이 벌기도 했었는데, 내가 일을 안 하고 누워만 있다니 기가 찼다. 그러나 그에게 따질 용기는 없었다. 그때만 해도 그 감정을 사랑이라고 믿었다.

상처는 때로 사람을 다른 상처로 이끈다. 익숙한 불행의 패턴 속에서 자신을 구원하려 타인의 결핍을 사랑이라 착각하기도 한다. 가장 취약한 순간에 찾아온 위안은 종종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그러나 진실은 언제나 불편하며, 관계는 그 진실의 민낯을 마주할 때 균열을 맞는다. 내 안의 불안과 결핍을 메우려 타인에게 의지하는 삶은, 결국 더 큰 공허로 돌아온다.
이전 15화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