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

by 천세아

하루는 남편 고향 친구들이 놀러 와 술을 마셨다. 밖에서 2차를 하고도 모자라 집으로 와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이내 하나둘 배를 깔고 거실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싫은 내색을 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만취했기에 포기하고 안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새벽에 남편이 방으로 들어왔다. 술이 어느 정도 깼을까 싶어 볼멘소리를 했다.


"나 지금 만삭 임산부인데 이건 너무한 거 아냐?"


실랑이는 길어졌다. 술 취해 피곤했고, 듣기 싫었을 것이다. 친구들 들을까 창피했을 수도 있다. 아무리 그랬기로서니 느닷없이 옆에 있던 스탠드를 집어 들어 임신한 아내에게 던지려 하다니, 겪으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던지려고 한 건지 시늉만 하려다 그리 된 건지, 본인 키 조금 넘는 스탠드를 번쩍 들더니 균형을 잃고 내 쪽으로 쓰러졌다. 미리 구해둔 신생아용 원목 침대 귀퉁이가 부서질 만큼 큰 충격이 나와 뱃속 아이를 그대로 덮쳤다.

임신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어떤 사고나 충격 이후 태동이 느껴지지 않을 때의 그 오싹한 기분.

놀란 나는 호흡이 빨라졌고, 손발이 저리다 못해 힘이 풀렸다. 밑으로는 뜨거운 것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119를 불러달라고 했지만 남편은 여전히 술에 취해 문지방에 걸터앉아 횡설수설할 뿐이었다. 결국 내가 직접 119를 불렀고, 구조대원들이 우르르 들어오자 그제야 그는 조금 정신을 차리는 듯했다. 들것에 실려 가까운 산부인과로 갔다. 좋지 않은 반응들로 검사가 길어졌지만, 다행히 아이는 무사했다. 검사 후 밖으로 나오니 눈물 콧물 범벅이 된 남편이 중천에 떠있는 해를 등지고 있었다.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겠다고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맨 정신에 각인된 내 상처는 어찌해야 하는가. 심지어 그 뒤로도 술은 끊기는커녕 줄이지도 못했다. 요즘 부부상담 프로그램에서 사회자로 나오는 운동선수 출신 연예인이 이런 말을 종종 한다.

'지팔지꼰' 지 팔자를 지가 꼰다는 말.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이토록 나에게 딱 맞는 말이 또 있을까 싶다.

아이를 낳고 산후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다. 나를 도와줄 친정 가족은 아무도 없었고 시댁은 너무 멀었다.

산후조리 해주시는 이모님을 모실 상황도 안 됐다. 제왕절개 후 수술 부작용으로 폐에 물이 차고 온몸에는 수포가 올라왔다. 너무 힘들어 아이를 낳은 기쁨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했다. 사실 처음에는 예쁜 줄도 몰랐다. 폐에 찬 물 때문에 이뇨제 등 약을 먹어야 해서 딱 한 번 초유를 먹인 뒤 바로 젖을 말렸는데, 지금도 그 고통이 너무 생생하다. 코로나19 때문에 병원을 가는 것도 쉽지 않던 때였다. 일주일도 안 되는 산후 조리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와서는 말 그대로 '멘붕'.

분유 포트라는 게 있는지도 몰라 냄비에 물을 끓여 온도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어떤 때는 뜨거운 분유를, 어떤 때는 차가운 분유를 먹였다. 다행히 아이가 너무 순했다. 뜨거우면 뜨거운 대로, 차가우면 차가운 대로 남김없이 잘 먹어줬다. 연락 안 하고 지낸 지 십 년은 족히 된 고등학교 동창이 SNS에 올린 아이 사진을 보고 DM이 왔다. 아이 재우는 전동 바운서를 물려주겠다고 했다. 돈은커녕 성의 표시할 여력도 안 됐다. 살면서 그렇게 염치없어 본 적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염치없이 연락해 혹시 언제쯤 받을 수 있는지, 지금 내가 가지러 가면 될는지 많이도 귀찮게 굴었다. 누가 뭐라도 도와준다고 하면 덥석덥석 받았다.


돌아가신 친정 엄마가 그리웠다.

쭉 밖에서 일만 하며 살다가 집에서 말 안 통하는 아이만 보고 있는 게 비생산적으로 느껴졌다. 비생산적이라는 말에 반해 몸은 또 너무 힘들었다. 몸도 얼굴도 너무 많이 변했다. 얼굴은 그전에 없던 기미들로 가득 차고 생전 없던 주름이 굵직굵직하게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뱃살이며 허벅지며 안 터진 곳이 없었고 살은 20kg가 넘게 쪘다. 그런 나에 비해 남편의 모습은 결혼 전이나 후나 다를 바가 없었다. 심지어 보험 일을 하면서 매일 말끔히 하고 나가니 전보다 더 젊고 멋져 보였다. 아이에게 휘둘려 목 늘어난 티에 헝클어진 머리… 내 모습을 내가 보기 싫어지니 남에게도 보이기 싫어지고 자신감은 추락했다. 하루하루 산후 우울증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하루는 남편이 회사 여직원을 종종 픽업해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여직원도 면허가 있고 차가 있는데, 왜 굳이 남편 옆자리에 타야 하는지. 집 안에만 있는 나는 부정적인 감정에 상상력이 더해져 언제부터인가 정상적인 사고가 어려웠다. 지금 생각하면 반쯤 미쳐있던 때였다.

여직원을 픽업하거나 굳이 옆자리에 태우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했다. 남편은 알겠다고 했지만, 이내 불안했던 믿음은 산산조각 났다. 남편은 약속을 어겼고, 나는 왜인지 그깟 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란다에서 떨어져 죽으려다 건너편 동에 사는 누군가가 신고를 하는 바람에 집으로 119 구급대원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와 나를 구했다. 나는 죽지 못했다는 분노와 살았다는 안도감에 하염없이 울었다. 곧이어 어떻게 알았는지 남편이 도착했다. 우리는 부둥켜안고 정말 많이 울었다. 그날부터 보건소에서 상담을 몇 차례 받았지만, 집에서 병원까지 가는 교통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서서히 발길을 끊었다. 가서 상담을 받으면 분명 잘 왔다 싶은데, 집으로 돌아오면 똑같았다. 그날의 여파로 한 달간 우리 집은 현관고리 쪽이 휘어져 문이 닫히지 않았다. 새 문을 해 넣을 때까지 반쯤 문을 열어둔 채 지내야 했다.

상처는 때로 가장 가까운 사람의 손에 의해 새겨진다. 폭력과 불신이 익숙한 이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의 관계는 또 다른 형태의 굴레가 된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가장 취약한 순간, 외면당하는 고통은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삶은 계속됐다. 반쯤 열린 문처럼 벌어진 상처를 비집고 기어이 들어오는 또 다른 날을 맞이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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