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

by 천세아

산후조리를 명분 삼아 아이와 남편과 함께 시댁으로 내려갔다. 차로 어림잡아 네 시간 거리. 도착한 나와 아이의 쉴 곳은 작은 옷방이었다. 오랜만에 모인 가족들은 거실에 모여 야식을 시켜 먹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 자리에 나와 아들은 함께하지 못했다. 장거리 이동과 낯선 잠자리에 아이가 잠들지 못해 함께 옷방에 누워있었다. 늦은 새벽, 술자리가 파할 무렵에서야 남편이 들어와 아직도 안 자고 있었냐 물을 뿐, 아무도 우리 모자를 찾지 않았다. 며칠 밤이 서러웠다.

매번 전화로 시부모 흉을 보던 형님은 시댁에서 마주하니 딴 사람이었다. 다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도 시어머니와 둘만 아는 이야기를 귓속말하듯 나눴다. 옆에서 지켜보던 시아버지가 한마디 했다.


"왜 애를 앞에 두고 둘만 아는 얘기 속닥거리냐?"


시아버지 역정에도 소용없었다. 나는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번죽 좋게 끼어들기 어려운 분위기에 할 수 있는 것은 남편과 둘이 있을 때 하소연하는 것뿐. 남편도 한두 번은 들어주더니, 나중에는 귀담아듣지 않는 듯했다. 내 안의 자격지심과 바닥 친 자존감이 그 시점에 폭발했다. 나는 자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틀 뒤면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 날이었다. 형과 한잔만 하고 와도 되겠냐기에 둘이 밖에서 마시는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아주버님과 형님이 사는 집에서 마시는 거였다. 시부모님은 일하러 나가시고 시댁에는 나와 아들, 그리고 시부모님이 키우는 강아지뿐이었다.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만 외롭게 동떨어져 있어야 하나 의문이 들었지만, 아이가 갑자기 열이 나는 바람에 그런 감정에 쏟을 여유도 없었다.

아파트 주변에 문 연 약국도 없고 면허도, 차도 없던 나는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계속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나중에는 전화를 돌려버렸다. 황당했다. 술을 얼마나 마셨으면.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까 하다 육아 선배인 친한 친구에게 전화했다. 아이가 열이 나고 계속 우는데 집에 체온계도 없고 시댁 식구들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얘기하며 서러움에 울음이 터졌다. 친구는 나를 진정시키며 일단 전화를 끊어보라고 했다. 알고 보니 남편에게 전화를 했더란다. 친구는 남편에게 아이 증상을 보니 뭐에 좀 놀란 것 같다며, 아기용 청심환이라도 사다 줄 수 있느냐 물었는데 남편은 이미 인사불성이라 소통이 안 됐고, 누군가 전화를 뺏어 들었다고 했다. 아주버님이었다.


"얘 오늘 집에 못 들어가. 그리고 당신 지금 이런 얘기한 거 책임질 수 있어?"


친구 아이가 아파 걱정이 되어 알려주려고 전화한 건데 알 수 없는 말로 책임 운운하며 아주버님은 친구를 몰아세웠다.

나중에 알게 된 상황의 전말은 이랬다. 아주버님 집에서 술을 마시며 스트레스를 풀던 남편이 그동안 내가 본인에게 보낸 모든 카톡 내용을 그 자리에서 아주버님과 형님에게 보여줬던 것이었다. 그간 쏟아낸 시댁과 형님에 대한 불만이 시댁 식구들에게 고스란히 노출됐다. 그다음 날에도 남편은 시댁에 돌아오지 않았다.

아침 일찍 시어머니에게로 전화가 왔다. 형님이었다. 전화를 하면서 메시지로는 이미지를 잔뜩 보내왔다. 나와 남편이 나눈 카톡을 캡처한 것이었다. 시어머니는 한동안 말이 없었고, 수화기 너머 형님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어머님 동서 정말 미친 거 아니에요?"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 자리에 더 있을 수 없었다. 수치스럽고 두려웠다. 밖으로 나와 남편에게 전화했다. 형님과 아주버님이 옆에 있는 데서 전화를 받은 듯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물었지만 그는 당당했다. 남편은 느닷없이 이혼을 요구했다. 순간 멍해지더니 이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무슨 말로도 대화가 안 되고 설득도 안 됐다.

내가 그동안 그에게 무슨 고충들을 터놓았는지 다 기억나지 않아 더 괴로웠다. 형님 내외와 남편이 똘똘 뭉쳐 나를 대하는 태도만 봤을 땐 마치 내가 밤사이 죽을죄라도 진 것 같았다. 상식적이지 않은 상황에 나 역시 상식적인 사고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는 바람에 아이를 데리고 먼 길을 떠날 자신이 없어, 나는 혼자 내 짐만 싸서 도망치듯 서산으로 올라왔다. 며칠간은 내 연락에 대답도 없었고 먼저 연락도 없었다. 놓고 온 아들 때문에 하루하루 피가 말랐다. 며칠 만에 연락이 온 남편은 시종일관 이혼만을 요구했다. 뭐에 씌인사람같았다.

불과 며칠 만에 폭풍처럼 몰아친 상황에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렸다. 그 후로도 한참 뒤,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가장 믿었던 존재로부터 인격적으로 발가벗겨지고 내쳐지는 경험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때, 나는 비로소 알게 됐다.
가장 안전하다 믿었던 공간이, 실은 가장 위험한 곳일 수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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