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지는 기원

by 천세아

며칠 만에 아이를 품에 안았다. 이혼도, 죽음도, 그때는 아무것도 중요치 않았다. 아들과는 다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매달렸다. 아이를 놓을 수 없었다. 내 상태로는 아이를 빼앗길 것이 명백했다. 살려달라고, 매일 빌었다.

시어머니는 그때부터 나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전화도 문자도 받지 않았다. 남편을 통해 이혼을 재촉했다. 남편은 시어머니의 말을 여과 없이 전달했다. 그 말들은 나를 얼음송곳처럼 찔렀다.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어느 날 술 취한 남편이 자랑했다. '친구'를 사귀었다고. 내 친한 여자 동생이었다. 남편보다 한 살 많은데 친구를 하기로 했단다. 그는 나와 그 동생을 비교했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떤 날은 지인들에게서 연락이 빗발쳤다. 남편이 그 동생과 손을 잡거나 어깨를 감쌌다는 목격담이었다.

나는 무력했다. 임신과 출산으로 대부분의 거래처는 끊겼고, 아이를 돌볼 사람은 나뿐이었다. 의지할 친정은 없었고, 모아둔 돈도 없었다. 몸은 망가졌다. 나는 남편을 필사적으로 붙잡아야만 했다. 매일 아침 눈뜰 때부터 잠들 때까지 남편은 이혼을 요구했고, 나는 빌었다. 죽은 듯이 지냈다. 산후조리는 진작에 포기했다. 간절함이 극에 달했다. 매일 산에 오르고, 절마다 108배를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개의치 않았다. 비와 땀에 젖어 돌아와도 남편 역시 완강했다.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괜찮았다. 내 기도는 더 이상 남편을 위함이 아니었다. 오직 나와 아이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다 남편이 정신과를 권했다. 짐작에 시어머니가 시킨 것 같았다. 이유야 어찌 됐든 같이 가서 검사를 했고 높은 수치의 우울증 점수가 나왔다. 이 외에도 무기력감과 분노가 함께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의사는 나를 내보내고 보호자와만 대화하고 싶다고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한참이 흘렀다. 원장실에서 나온 남편의 표정이 지금까지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잠시 갓길에 차를 세우더니 차에서 내려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시어머니인 듯했다. 한참을 통화하다 다시 차에 타서 집으로 운전했다. 오는 길에 별말은 없었다. 집에 도착해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미안했어. 앞으로 같이 열심히 치료해 보자."


그 한마디에 그간 버틴 설움의 시간이 한꺼번에 쏟아져 울음으로 터져 나왔다. 한참을 울었다.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그는 하루아침에 다시 예전의 다정한 남편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그토록 기다리던 시어머니의 답장도 받을 수 있었다. 치료 잘 받으라는 문자였다. 그날로 지옥은 끝나는 줄 알았다. 잠깐의 달콤한 꿈이었다.

아이가 6개월 차 되는 달에 가정 어린이집에 맡기고 일을 시작했다. 뒤늦게 면허도 따고 운전도 시작했다. 시어머님과도 자주 연락하고 지내며 오히려 전보다 더 돈독한 고부지간을 자랑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남편과의 관계는 점점 멀어졌다. 내 입장에서 그 이유는 술 때문이었다. 술 때문에 내 몫이 되는 일이 너무 많아졌고 아이에게 좋지 않은 상황이 반복됐다. 새벽에 아이가 아파도, 내가 아파도, 남편은 술에 취해 잠들면 그만이었다. 고주망태가 되어 아이방에 소변을 누기도 했다. 생판 모르는 남의 차에 들어가 잠들어있는 걸 경비아저씨가 깨워 들여보내기도 하고 아파트 복도에서 널브러져 잠들어있기도 했다. 난 주말에도 아이를 데리고 일터에 나갔다. 밖에서도 집에서도 쉬지 못했지만, 남편은 내게 최소한의 '내조'를 원했다. 그리고 종종 그런 하소연을 시댁에 내비치기 시작했다. 내 입장에서는 불화의 원인은 술 때문이었지만, 남편 입장은 내가 주부로서의 역할을 소홀히 한다는 게 이유였다.

내면의 갈등은 화가 되어 밖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걸핏하면 이혼을 무기 삼았지만, 서로가 아이를 핑계로 신경전만 했다. 그러다 술에 취한 남편이 아이 앞에서 나에게 손을 올렸을 때. 나는 내 안에서 처음으로 단호하게 이혼을 결심했다. 양육비를 받지 않는 조건으로 친권과 양육권을 모두 내가 갖고 합의 이혼을 했다. 그때만 해도 나 혼자 벌어 우리 두 식구 먹고살고, 조금씩 저축도 할 수 있었기에, 아이가 주눅 들지 않게 잘 자라기만을 바라며 모든 포커스가 아이에게 맞춰져 있었다. 불안감은 크지 않았다. 그즈음이었다. 연락이 두절됐던 친정 아빠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켜야 할 것이 생겼을 때, 인간은 믿기지 않는 강인함을 발휘한다. 한 번의 따뜻한 말과 잠시의 다정함은 억겁의 시간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는 상처는 결국 관계의 끈을 놓게 만든다. 포기하고, 끊어내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다.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가장 깊은 바닥에서부터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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