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과 비상

by 천세아

그때 그 일 이후, 친정 아빠는 함께 살던 두 모녀에게 버림받은 모양이었다. 말로는 '악랄한 두 모녀'에게 사기를 당했다고 했지만, 나는 그의 전적을 알기에 그 말을 다 믿지는 않았다. 그는 손주가 있다는 말에 몹시 보고 싶어 했다. 만나자고 했다. 아이를 낳는 순간부터 사무치게 그리웠던 '부모'라는 존재. 미워도 미워도 보고 싶던 존재. 나는 그렇게 합리화했다.

친정 아빠는 한동안 인천에서 서산으로 자주 오갔다. 올 때마다 돈 10만 원씩을 건네며 생활비에 보태라 했고, 손주 선물도 사주곤 했다. 시댁과 남편은 친정 아빠와 연락하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당연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이 옳았다.

결국 1년도 채 되지 않아 친정 아빠는 나를 상대로 사기를 치고 떠났다. 그것이 씨앗이 되어 평생 만져보지도 못한 억 단위의 빚을 떠안았다. 나는 개인회생을 신청했다. 그 과정은 길고 순탄치 않았다. 개인회생 인가가 떨어지기까지 몇 달간, 나는 아들과 먹고살 생활비와 병원비 명목으로 지인들에게 한 푼 두 푼 도움을 받았다. 사채에 손을 대기 일보 직전까지 몰릴 때면, 주변 누군가가 어떤 식으로든 손을 내밀어 주었다. 덕분에 다행히 사채에는 손대지 않았다.

'아직은 사지 멀쩡하니 벌어서 갚으면 되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될 줄 알았다. 그렇게 버티던 그해 가을, 나는 공황장애로 운전 중 실신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혼자였고, 길가 얕은 도랑에 빠졌지만, 전날 비가 많이 와 땅이 젖어 있던 터라 중상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고로 인해 공황장애는 더 심해졌고, 보험 문제로 치료를 계속할 수 없어 몸도 성치 않았다. 유일한 수입원이던 직장을 잃었다. 기억도 조금 잃었다. 그 뒤로 생활고는 점점 심해졌다. 메워도 메워도 구멍은 커져만 갔고, 개인회생 중인 밑바닥 신용에게 돈을 빌려주는 곳은 없었다. 지인들에게 여기저기서 빌린 돈은 어느새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다.

불운은 내게 숨 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모든 은행 계좌가 정지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금융 사기에 연루됐다고 했다. 영문도 모르고 경찰서로 달려가 신고했지만, 결과적으로 자칫 잘못하면 내가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절망적인 말만 듣고 경찰서를 나왔다. 교통카드도 안 되고 차비도 없어 집까지 하염없이 걸으며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원인도, 피해자도, 가해자도 오리무중인 상황에 왜 하필 내가 연루된다는 말인가? 변호사 선임할 돈도 없었고, 무료 변호사를 신청하니 근처 지역에서 한 달 뒤에나 상담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때 세상이 나한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 그만 버티지?' 나는 그 말에 완전히 지쳤었다. 정말 마지막이라 생각했다.

유서를 남기는 마음으로, 그러나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SNS에 내 이야기를 적어 내려갔다. 그것은 삶을 향한 절규라기보다는, 내가 존재했음을 알리는 조용한 마지막 몸짓이었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익명의 화면 너머에서 수많은 손들이 뻗어왔다. 내 글을 읽은 사람들은 단순히 동정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누군가는 내 글에 나온 지역을 특정해 112에 신고까지 했다. 자살 방지를 위해 가정에 방문한 경찰관들은 내 사정을 듣고는 빵집에서 빵을 잔뜩 사다 주기도 하고, 행정복지센터에 내가 받을 수 있는 정부 지원책을 문의해 주었다. 그 덕분에 이혼 후 12개월 만에 한부모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그저 죽음을 기록하려던 나의 글이, 생명을 불러오는 기적의 주문이 된 것이다. 그 모든 상황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아, 아직 나를 밀쳐내지 않는 세상이 있구나. 낯선 이들의 이름 없는 선의와 따뜻한 개입은 꺼져가던 내 안의 희망의 불씨를 다시 살려냈고, 나의 삶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돌려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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