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삶의 안쪽으로

by 천세아

낯선 이들의 온정이 메말랐던 마음에 단비처럼 쏟아진 후, 나는 비로소 숨을 깊이 들이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잊고 있던 하나의 인연이 놀랍도록 선명하게 떠올랐다. 스물한 살, 철없던 시절 내가 만났던 그 사람. 나는 그의 소중함을 알지 못했고, 내 멋대로 굴며 그를 힘들게 했었다. 헤어진 후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줄곧 좋은 친구로 지내왔다. 서른 살 무렵, 그 친구가 나에게 불쑥 던졌던 말이 있었다. "서른다섯까지 서로 만나는 사람 없으면 우리 둘이 살래?" 나는 그때 그 말이 진심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긴 세월 동안 나와의 재회를 꿈꾸며, 내 주위에서 한 발짝 떨어져 조용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다시 일어서기를 기다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삶을 향한 나의 작은 움직임을 본 것일까. 이제 그 사람은 기꺼이 나와 내 아들의 보호자가 되겠다고 나섰고, 곁을 함께 해주고 있다. 그의 부모님, 그러니까 나의 새로운 시부모님도 선입견 없이 우리를 품어주었다. 상처받고 흩어졌던 나의 가족이라는 개념은, 그렇게 '새로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함께하기로 한 약속은, 무너졌던 나의 세계를 다시 쌓아 올리는 견고한 주춧돌이 되어주었다.


이혼 후 얼마 되지 않아 어린이집 상담을 다녀온 적이 있다. 나는 우리 아들이 매우 순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린이집 선생님의 이야기는 달랐다. 아들은 속 깊은 아이였다. 집에서 있었던 일을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고, 또래 아이들처럼 미주알고주알 떠들기보다는 감정을 억누르는 경향이 강하다고 했다. 편하게 떼쓰고 감정을 표현해야 할 나이인데도, 스스로를 제어하는 '애어른' 같은 모습이 보인다는 설명이었다. 선생님은 다른 아이들과의 마찰을 우려해 아들에게 더 많은 신경을 써주고 계셨다. 내가 숙제를 봐줄 여력이 안 될 것 같아, 아들은 늘 선생님과 어린이집에서 따로 숙제를 해왔다는 사실도 그날 처음 알았다. 나의 부재에 대한 죄책감과, 그 빈자리를 채워준 타인에 대한 감사함이 복잡한 감정으로 뒤섞였다. 나의 불완전함이 아이에게 드리웠던 그림자를 직시하는 순간이었다.


선생님의 섬세한 관심과 새로운 가족의 품 안에서, 아들은 비로소 제 나이처럼 굴기 시작했다. 아이의 투정이 이리도 반가울 줄이야. '아빠'라고 부르며 스스럼없이 매달리는 아들과, "우리 사이에 자식은 우리 아들만 있으면 된다"며 물질적으로나 마음적으로 모든 것을 쏟아붓는 그 사람. 이 둘 사이에서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다. 닫혔던 마음은 조금씩 치유되고 있고, 상처로 얼룩졌던 몸과 마음을 재정비하기 위해 다시 일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다. 나는 그렇게 다시, 삶의 안쪽으로,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상처가 아물어가는 과정은 여전히 느리고, 잊지 않으려 했던 기억들도 때론 불쑥 치고 올라온다. 하지만 이제는 그 순간을 외면하지 않고, 따뜻한 시선으로 마주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불완전한 과거를 온전히 받아들이면서, 나 자신에게 비로소 온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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