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덜 광고 같은 광고 이야기
나는 88년생 용띠다. 부경대학교 07학번. 화학공학과를 턱걸이로 진학하고, 남들처럼 그냥 저~기 거제도 조선소나 혹은 다른 지방 화학회사 혹은 공업회사에 다닐 줄 알았다. 문득, 선배들을 보니 굳이 지방에서 내 인생을 꼴아 박을(?) 필요가 있는지 의심이 들었다.
옛날부터 오랫동안 들어왔던, "모로 가도 서울로 가면 된다."라는 말이 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서울로 갈 수 있을까? 를 고민했던 것 같다. 서울에 가보니, 부산 사람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치열하고 피 터지게 살고 있는 수많은 또래들을 만났다. 그들의 하루는 내 부산 친구들의 일주일이었고, 그들의 어마어마한 스펙은 내가 가지고 있던 부경대학교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서울 사람들의 하루는 부산 사람들의 일주일과 맞먹었다.
대기업/공기업에서 주체하는 대외활동을 동시에 2~3개 아니 5개씩 하는 친구들도 만났었다. 나는 물어봤다. '그렇게까지 치열하게 하루를 보내는 이유가 뭐냐고' 친구들은 대답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먹고살려고." 그리고, 그들의 하루, 아니 1년-2년을 지켜보았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경쟁률을 뚫고 롯데의 대홍기획 인턴, 제일기획 인턴 등으로 들어갔었다. 인턴쉽 기간 동안에도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업무 강도와 엄청난 압박과 스트레스를 견디며 사는 그들과 섞여 사니,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광고가 아무리 좋아도 내 모든 시간을 헌납할 정도인가?
이 미친 업무 강도와 경쟁률은 한국이 미친(?) 걸지도 모른다.
그때였던 것 같다. 어쩌면, 한국이 미친 건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모로 가도 서울로 가라는 말이 있다면, 모로 가도 미국으로 가면 된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광고를 하는 게 나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한국을 떠나야만 하는 이유 총 5가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미국 생활 5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아래의 5가지 이유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그때의 내 결정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나 자신에게 지금도 감사하다.
내가 한국을 떠나 미국 뉴욕에서 광고를 하는 결정적인 이유 5가지는 아래와 같다.
1. 연봉
2. 업무 강도 - 워라벨
3. 생활/문화/다양성 수준 차이
4. 가속화되는 글로벌 - 영어
5. 커리어를 위한 투자 - 미래 생존
2012년, 내 생애 첫 인턴쉽 월급은 22만 원이었다.
나는 서울에 있는 프로덕션 기획실에서 카피라이터 인턴으로 한 달을 일했었다. 당시 나의 하루 일과는 다음과 같다. 출근 아침 8:30 - 9:00 사이. 퇴근 없음. 회사에서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자거나 혹은 밤 11시-12시 사이에 퇴근. 서울 대학로, 혜화동에 있던 월 10만 원짜리 고시원에서 잠들었다. (그래도 혜화동은 정말 아름답고 문화가 숨 쉬는 곳이었다!)
뭐... 말도 안 되는 스케줄과 하루 3-4번 있는 크리에이티브 체크인을 아침 9시, 점심 1시, 저녁 6시, 밤 10시였다. 하하하하! 지금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이 스케줄을 당시 내가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다. 기획실의 업무는 다음과 같다. 프로덕션 기획실은 기본적으로 대홍기획 혹은 제일기획 같은 큰 광고대행사가 기획실에 브리프를 주면, 우리는 브리프를 바탕으로 콘셉트를 짜고, 스크립트 (안)를 써서 영상으로 가져가는 식이었다. 여기서 정말 말도 안 되는 양의 노력이 가해지는데...
기획실장이 쓴 안을 기본으로 프로덕션 PD들이 카피에 알맞은 그림들을 찾아서 영상을 만든다. 즉, 카피에 맞는 그림을 찾기 위해서 일본의 광고를 정말 미친 듯이 많이 참조하고 또 가져갔었는데... 나는 지금도 '대체 프로덕션이 대행사를 위해 이렇게 많은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그리고, 우리 가족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사실상 도망쳤다. 그리고 받은 내 월급은 22만 원이었다. 하하하!!!!! 엄청난 회의감이 몰려오고,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지?라는 생각이 내 발목을 붙잡고 광고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결정적으로 프로덕션을 그만두게 된 것은 말도 안 되는 워라벨보다 더 지독했던 문화였다.
기획실장은 자신만의 방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 같은 인턴이나 우리 기획실 선배 카피라이터는 그 기획실장의 방을 청소하고 관리하는 일도 맡았는데... 그가 피운 담배를 치우거나, 먹은 음식을 정리하고, 바닥을 쓸고 닦는 등의 일이다... 나는 이미 군대를 전역한 뒤라, '사회에도 이렇게 더러운 일을 아직도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었고, 더 결정적으로 나를 도망치게 만든 건 다음과 같다.
야, 어떻게 카피를 잘 쓰는지 내가 알려주면 내가 남는 게 뭐냐?
하루는 기획실장의 방을 청소 후, 담배 피우고 있는 기획실장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광고를 잘할 수 있죠? 어떻게 콘셉트를 그렇게 잘 짜시는 거죠? 카피를 어떻게 잘 쓸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했다. 그의 대답은 정말 가관이었다. "야, 어떻게 카피를 잘 쓰는지 내가 알려주면 내가 남는 게 뭐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에라이, 이런 인간이 어떻게 광고를 한다고 하는 건지... 이런 인간과는 다시는 상종도 하고 싶지 않다.'라고.... 아마도 그게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던 것 같다.
그리고 2021년, 미국 뉴욕의 오길비에서 아트 디렉터로 일하고 있는 지금. 내 광고 짬밥은 어느덧, 5년 차다. 물론, 한국에서 경력과 미국에서 했던 1년간의 인턴쉽은 경력에서 제외한다. 한국 연봉과 미국 연봉의 차이에 대해서 내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먼저, 한국 연봉은 위의 잡코리아에서 보여 주는 숫자가 현실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경우, Leo Burnett 시카고 본사에서 신입으로 받았던 연봉은 $50000. 대충 세전 5000만 원 정도?
3년간 신입으로 5000만 원을 벌었고, 딱 3년 뒤, 진급을 해서 $65000. 대충 세전 7000만 원 정도? 뭐 사실상, 이 연봉을 받은 기간은 진급 후 5개월 정도? 당시, 나의 능력에 비해서 적은 연봉과 직급을 가지고 있는 것을 정말 잘 알고 있는 나의 보스는 늘 진급과 연봉 인상을 본인이 곧장 시킬 수 없는 것을 한탄했다. (레오 버넷은 푸블리시스의 승인이 없으면 연봉 및 직급 인상이 불가능하다) 나는 속으로, '이 보스도 말로만 나를 케어한다고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즉각적으로 했었고, 곧장 뉴욕에 있는 대행사들에 이메일을 보냈다.
나는 2021년 이직 당시에, 뉴욕의 Mother라는 광고대행사와도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는데, 오길비 뉴욕의 CCO와 인터뷰 중 mother와도 이야기 중이라고 말했더니, CCO는 인터뷰 중 나에게 "mother는 별로야~ 우리랑 일하자. 오퍼 바로 보낼게. 응?" 그렇게, 입사에 성공했고, 결국 오길비 뉴욕에서 $90000. 1억 연봉을 약속받고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물론, 내가 정~말 많은 돈을 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러한 연봉 인상률은 한국에선 꿈꾸지 못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감히 해 본다. 한국에서 프로덕션 5년 차 짬밥이라면 연봉이 얼마일까? 생각만 해도 끔. 찍. 하. 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당시의 한국 광고계의 업무 강도는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극강이었다. 당시라고 해봤자, 불과 7-8년 전이지만, 지금은 많이 나아졌길 바라본다. 어쨌든, 당시의 미친 듯한 업무 강도는 '광고인은 개인 시간 따위는 없다.'라고 아우성을 치는 듯했고, 정말 뒤도 안 돌아보고 한국 광고계 입성을 포기했다. 뭐... 단순히 프로덕션 기획실 인턴 경험 하나로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프로덕션 기획실 카피라이터 이후에, 이노션 인턴쉽도 카피라이터로 경험했었다. 거기서 만난 시디 님께서도 아주 결정적인 말씀을 해주셨었다.
당시, 나는 한국 광고계의 워라벨이 살인적이라는 것을 느꼈고 주변 동료들을 보면서 점점 큰 확신이 들고 있었었다. 그러던 중, 당시 이노션 시디님에게 물었다. "시디님, 제가 미국 광고학교에 진학해서, 미국에서 광고를 하면 어떨까 생각인데요... 조언 좀 가능할까요?" 시디님 왈, "한국 광고계는 앞으로 점점 더 어려워질 거고, 너한테만 하는 말이지만, 답이 안 나온다. 떠날 수 있으면 떠나서 돌아오지 마라"라는 말씀을 웃으며 하셨고, 나는 사실 그때 그렇게 솔직하게 말씀해주신 시디님이 정말 감사하다.
미국에서는 365일 중에 거의 265일은 9시 출근 - 5시 퇴근을 지켰다. 가끔 피치라던가, 정말 정말 급한 일들을 마감하기 위해서 야근을 하긴 했었다. 주말 출근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하지 않았다. 그리고, 늘 야근을 할 때는 프로젝트 매니저들이 맛있는 음식을 시켜서 동료들이 다 같이 나눠 먹고 웃으며 일했다. 일을 끝마치고 밤 10시에 동료들과 함께 대행사를 나설 때는 알 수 없는 만족감과 희열, 그리고 뭔가 내가 정말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한국에서는 노예처럼 내 능력에 대해서 인정받지 못하고 착취당하는 느낌이었다면, 그와는 정반대로 야근을 해줘서 고맙다는 격려와 훌륭한 작업을 해줘서 고맙다는 칭찬을 더 많이 들었다. 그래서, 종종 하는 야근이 그렇게 슬프지많은 않았다.
나는 1-2년 동안 매주 서울과 부산을 고속버스로 오갔었다. 인턴쉽뿐만 아니라, 수많은 대외 활동 및 공모전 참여를 하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더 치열하게 사는 친구들이 많은 서울 친구들과 광고에 대한 꿈을 키우기 위함이었다. 당시에, 혜화동 고시원에서 한 달을 살고,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데, 나는 너무 많이 사서 하는 거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획실에서 경험한 똥 문화는 나를 절망에 빠뜨리게 만들기 충분했었고, 사회는 똥꼬를 잘 빠는 사람이 출세한다는 것을 나에게 가르쳤다. 지방 사람들과 서울 사람들이 서로 섞이는 일종의 다양성(?)은 옛말이었고, 실력이 없으면 무리에 낄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한국에서 실력도 없는데, 늘 팀장 역할을 했었고, 팀장이 주는 무게감은 나를 성장시켰다. 아무리 대학생 공모전이더라도, 나는 그 누구보다 프로페셔널하고 원하는 목표를 분명히 세웠으며,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함께 협동하는 것을 중시했었는데... 결국은 정말 잘하는 한 사람이 프로젝트를 완성시킨다는 것도 깨달았다...
2015년, 미국에서의 첫 생활은 정말 최악이었다. 유학생 신분으로 마이애미에서 정말 빈곤하고 위험한 동네에서 살았었는데, (월세 $600) 처음에는 집 보증금을 못 돌려받는 등 수많은 고역과 외로움과의 사투를 벌였다. 하지만, 외노자 신분으로 첫 신입 명함을 얻었을 때는 달랐다. 나는 시카고 중심에 있는 아파트 타워에 원룸을 마련했고, 매달 $1500의 돈을 지불했다. 내 신입 연봉의 절반이었지만, 내가 지금까지 살아본 모든 곳을 통틀어서 최고로 좋은 집에 살기 시작했었다. 시카고 중심 31층 아파트에서 보이는 풍경은 나를 설레게 만들었고, 더 큰 성공을 이루고 싶게끔 자극했다.
대행사 내에서, 나는 우리 팀에 에너지를 제공하고, 활력을 북돋는 역할을 신입으로서 아주 잘했었다. 동료들은 나를 'sunshine'이라고 부르고 온갖 종류의 미국 문화에 초대하고 나에게 소개해줬다. 나 또한 내가 외노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끔, 동료들을 대했고 주로 백인 문화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나의 지금 가장 친한 친구는 87년생 백인 친구인 벤이다. 미국의 풋볼, 술집 문화, 길거리 문화, 대행사 내의 문화 등 정말 다양하고 재미있는 문화들을 받아들이고 참여하니 시야가 정말 많이 넓어졌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단순히 시카고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을 넘어서 전 세계가 나의 무대라는 생각이 확실하게 들었다. 아시안이든 백인이든 흑인이 던 지간에 우리는 결국에는 창의성을 담보로 새로운 것을 만들고 숨쉬기 위해 일한다는 분명한 의식이 생겼고, 나에게 피부색은 더 이상 아무런 장벽이 되지 않고 있다. 피부색이 아니라, 개인의 색깔과 창의성을 존중하고 나누는 즐거움을 배웠다. 나는 솔직히, 이러한 거대한 시각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이 아마도 미국 생활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코로나 이후, 지속되고 있는 재택 문화에서 '영어'는 빼놓을 수 없는 기본 아이템이다. 나도 유학생 초기 때는 영어를 정말 정말 못했다. 아니, 아예 알아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 했다. 피를 깎는 노력과 '안되면 되게 하자'는 배짱을 내밀어, 영어를 못 알아들어도 억지로 나 자신을 미국인들에게 들이밀었다. 그렇게 5년이 지난 지금, 나는 정말로 영어를 잘한다. 아니, 나는 완벽하게 bilingual이 되었다. 더 이상, 한국말을 머릿속으로 미리 번역하지 않는다. 광고 콘셉트를 설명하고, 아트 디렉션을 프로덕션 에디터, 애니메이터, 디자이너들에게 분명하게 전달하고 미팅 분위기마저 조율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신입 초기 3년 시간이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시카고의 영어는 정말 표준어라고 할 정도로 발음이나 억양 등이 표준에 가까웠는데, 이것도 솔직히 크게 한몫을 했던 것 같다. 거의 90% 이상이 백인 사람들이다 보니, 그들과 섞여서 호흡하고 모르는 말들은 이해가 안 된다고 분명하게 표현했었다. 그리고 영어로 된 책을 많이 읽었다. 특히 미국의 전설적인 광고책들을 많이 읽었고, 그것도 솔직히 내 영어 실력 향상에 아주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전 세계 사람들이 어디에서 일을 하던지 상관이 없는 시대가 왔다. 이러한 시대에서, 영어를 못한다는 것은 정말 발목을 잡는 것과 같았다. 사실, 한국에서 아무리 영어학원을 다니고 해 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솔직히 한국 영어는 뭐랄까? 시험을 위해서 하는 엉터리/쓰레기 영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내가 25년간 공부했었던 영어는 현지에서 아. 무. 런 도움을 주지 못했었으니까. (참고로 내 수능 영어는 2등급이었다) 그래서였던 것 같다. 한국이 아니라, 미국으로 가야 하는 이유. 영어 하나만이라도 잘하면 솔직히 한국 돌아가서도 굶어 죽을 걱정은 없을 것 같았다. 진짜 안되면, 영어 선생님 해도 되니까. (나는 참고로 20살 -21살 때 2년간 중고등학교 단과학원 과학 선생님을 했었기도 했다)
햔국에선 프로덕션 기획실, 이노션 인턴, 부산 국제 광고제 영스타즈, 수많은 국내 및 국제 공모전 입상 등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과 스펙들을 쌓았었다. 당시, 한국에서 쌓을 수 있는 거의 모든 메이저 스펙을 다 섭렵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더 뛰어난 스펙과 실력을 가진 동료들이 많았었다. 그렇게 뛰어난 내 친구 동료들은 결국에는 제일기획에 못 갔다. 뭐 당시에는.... 부산 국제 광고제 뉴 스타즈라고 해서, 3년 차 이하 현직 광고인들이 대행사 별로 와서 경쟁을 하는데... 여기서, 제일기획 출신들의 콧대가 얼마나 기고만장한 지, 지금 생각해도 조인트 세게 까서, 바닥에 무릎 꿇게 만들고 싶다. '우리는 제일기획이니까 말 그대로 일류야'라는 무언의 자세와 태도는 다른 대행사 출신 사람들과 벽을 만들었고, 1,2위 대행사 출신 광고쟁이들은 정말 밥맛 그 자체였다. 뭐... 나는 솔직히, '형 정말 밥맛 없어요~'라고 면전에다가 말할 정도로 깡다구가 셌던 부산 남자라... 뭐 지금도 그들이 쳐놓은 벽에 과연 나 같은 쪼랩이 낄 자리가 있는지 의문스럽다. 그들의 엄청난 허영심과 자만심은 감히 나의 자존심에 큰 스크래치를 냈었다.
미국에서는 달랐다. 솔직히 굳이 따지자면, Leo Burnett은 시카고에서도 넘버 1 광고 대행사다. 미국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아주 훌륭한 광고 대행사다. 한국의 제일기획 같은 느낌이지만, 여기 사람들은 다른 대행사 사람들에게 큰 텃세가 없었다. 오히려, 더 많은 소통을 하고 친하게 지내는 느낌이었다. 다분히 그럴 법도 한 것이... 결국에는 광고계는 너무나도 좁아서, 서로서로 다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개쓰레기 같은 태도는 결국에는 본인에게 손해이기 때문이다. 결국, 광고인들의 실력은 비슷비슷하고 우리는 다 비슷비슷한 광고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어쨌든, 한국에서 경험한 텃세는 훗날 그들이 나를 무시 못하게 만들 수 있는 분명한 에너지를 제공해 주었다. 아마도, 이제 내가 미국 뉴욕 오길비 본사에서 일하니까 당시 제일기획 출신 내 친구들이 나를 업신여기지 못하지 않을까? 결국, 미래 생존을 위한 나의 투자는 내가 한국을 떠나게 만드는 또 다른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솔직히,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다시는 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만들고 싶은 나의 아주 거대한 야망이 있었다. 훗날, 내가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도 당시에 그 친구들이 있다면 내가 텃세가 뭔지 분명하게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내 똥꼬를 빨게 만들 거다.
"열심히 노력한 당신 떠나라!"
솔직히 한국 취준생들 스펙 전 세계 탑 수준이다. 만약 한국이 정말 각이 안 나온다면, 분명한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행복하게 살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다 행복하자고 하는 짓 아닌가?
나는 옛날에 우리 부모님에게 PPT를 만들고 발표를 했다. 내가 한국을 떠나야 하는 이유와 미국에서 성공할 수 있는 분명한 계획을 제안했었다. 그리고, 부모님에게 돈 좀 빌려달라고 말했다. (물론 아직까지 안 갚고 있는 거는 안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