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보통의 감정

영화 <Foxcatcher> (2014)

by knitter the lonely

* 이 글은 영화 <폭스캐처>에 대한 리뷰이며, 영화 전반적인 내용이 기재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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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스캐처> 스틸컷

나는 기록하는 것을 좋아한다. 거창한 일이 아니더라도, 그날 가진 감정들을 적어두다 보면 그것들은 나름의 역사가 된다. 한때 흑역사를 생성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던 싸이월드 다이어리를 읽다 보면 주어도 없는 누군가를 향한 분노나, 끝도 없이 바닥을 파고 들어가는 고민을 읽을 수 있다. 공부, 취업, 결혼. 인생의 고민은 나이에 따라서 달라지지만 그때도 지금처럼 똑같이 고민하던 것들이 있었다. 타인으로부터의 관심. 나이와 상관없이 나를 끝까지 괴롭히는 문제는 인정욕구를 기반으로 한 관심이었다.


나는 이 지나친 관심이 대인관계를 망친다고 맹신했다. 그 결론의 근거는 나였다. 나는 유독 타인의 관심과 인정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다. 잘했다는 말을 듣고 싶어 했다. 나는 나를 판단하는 잣대가 외부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타인의 판단이 중요했다. 스스로 즐기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타인이 나를 인정해주었을 때, 나에게 공감해주었을 때, 내 성과물은 의미를 가졌다. 그것은 치졸한 과정이었다. 과거의 나는 관심이 필요했지만, 쿨하고 싶어 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최근 인터넷에서 '관종'이라는 말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이 말은 ‘관심종자’의 줄임말로 타인의 관심을 지나치게 필요로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소위 이 관종들은 타인에게 관심을 얻기 위해 억지로 음식의 리뷰를 지어내거나 더 나아가 범법을 저지르고 있는 형국이다. 이것들이 최근 나타난 현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관심을 얻기 위한 피력은 SNS의 발달로 더 쉽게 표면으로 올라왔을 뿐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싸움이었다.


영화 속 존 듀폰은 레슬링에 관해 비이성적으로 강한 인정욕구를 보인다. 존에게 친구라고는 고작 어머니가 만들어 준 허상뿐이었다. 일방적으로 자신을 모시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랐기에 어머니는 불가피하게 사적인 대인관계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자신이 좋아하는 레슬링을 부정한다. 그 부정은 존에게 레슬링을 향한 마르지 않는 인정욕구를 심어주었다.

마크 슐츠 역시 인정을 원했다. 그는 형과 마찬가지로 미국 레슬링 국가대표선수였고 금메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형의 강연을 원하고 형의 지도를 원했다. 같은 분야에서 활동하는 형의 그늘서, 그는 자신의 레슬링을 인정받길 원했다.


그런 두 사람의 동행은 마치 운명인 듯 보인다. 시작은 존이었다. 존은 본인이 가진 돈으로 마크의 인정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마크의 레슬링을 애국이라는 근사한 단어로 포장하고, 꿈을 펼칠 기회를 주었다. 오랜 시간 목말랐던 감정이 채워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이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마크는 그래서 기꺼이 존의 텅 빈 감정을 채워주었다. 체구도 한참 작고, 기술도 부족한 존이 자신의 앞에서 레슬링에 대해서 떠드는 것은 우스운 일이었지만, 그것을 견딜 만큼의 가치가 분명 있었다.


형이 아닌 자신의 레슬링을 인정해 주는 것. 레슬링이라는 분야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 그것이 마크와 존이 가장 깊숙이에 가진 욕망의 진짜 모습이었다. 둘의 인내는 그것을 건드렸을 때 깨져버린다.

영화는 그 진짜 욕망을 직접 언어화하지 않는다. 그 욕망은 무엇보다 강하지만, 입으로 꺼내는 순간 너무나도 치졸해진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 첨예한 감정의 변화를 온몸으로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존이 총을 들고 나타날 때마다, 나는 그 응집된 감정들이 터져버릴까 두려움에 떨었다. 대사로 설명하지 않는 그 불친절한 감정을 우리가 놓치지 않고 쉽게 따라갈 수 있는 건, 어쩌면 그것이 우리 모두가 가진 보편의 감정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크의 억눌린 욕망은 그저 그 저택을 떠나는 것에서 끝났지만, 존의 욕망은 더 단단한 총알이 되어 결국 발사되어버리는 비극을 불러오고야 만다. 존이 가진 권력이 컸기에 그만큼 결과도 큰 비극이 되었다. 결과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이와 같은 순간을 겪는다. 해소되지 못하는 감정의 축적은 어떻게든 마지막을 맞이한다.


이 시점에서 나는 내 안에 쌓인 감정을 들여다보게 된다. 내 감정에 얼마나 솔직해질 수 있는가. 이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와 어떻게 공생하고 있는가. 구질구질한 내 감정과 얼마나 화해했는가. 나는 어느 순간 이 감정을 내 것으로 인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유치하게 느껴지더라도 소리 내 말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내가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이 감정이 남을 해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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