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Frank> (2014)
안 그렇게 보여도 이 글은 영화 <프랭크>의 리뷰.
영화 전반에 걸친 이야기가 다뤄집니다. 그러니까 스포 덩어리라는 말.
어렸을 때, 나는 책 읽기를 굉장히 좋아했다. 거기에는 물론 내 의사도 있었지만, 웬만한 학교 도서관과 맞먹을 정도로 책을 사주던 엄마의 눈물겨운 노력이 아주 많은 기여를 했다. 다른 곳엔 짠돌이처럼 굴었지만 책을 사주는 것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백과사전도 출판사 별로 다양했고 과학만화도서도 많았는데, 그중에 자동차와 공룡이 나오는 책을 굉장히 좋아해서 다 떨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있다.
국민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서서히 엄마가 정해준 취향에서 벗어나 나의 길을 가기 시작했는데, 그 시절 유행하던 꼬마 흡혈귀 시리즈라던지 화평사에서 나온 신세대 X문고를 친구들과 돌려 읽곤 했다. <이별 따윈 겁나지 않아>, <2100년의 인어공주> 같은 제목의, 제목만 봐도 뻔하디 뻔한 러브스토리였는데, 그동안 읽던 교육도서를 생각하면 나에게 있어 그건 천지개벽과 비슷했다.
더 대단한 건 없을 것 같던 국민학교 6학년의 어느 날, 나는 외갓집에서 처음으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소설을 만나게 된다. 김진명 씨가 쓴 바로 그 소설이다. 그 책을 읽었을 때의 충격을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벌렁벌렁 거린다. 이 이야기가 진짜로 있었던 이야기일까를 고민하며, 몇 날 며칠을 도서관에서 이휘소 박사에 대해 찾는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아직도 팩션이라고 불리는 장르의 소설을 제법 좋아하는 걸 보면, 그 처음의 날카로운 기억이 어느 정도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뒤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 차지혁의 <키재기>를 읽으며 나는 시시한 어린이용 소설에서 졸업했다.
그리고, ‘읽는 것’에 대한 열망이 ‘쓰는 것’으로 변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처음으로 형태를 갖춘 ‘이야기’라는 것을 쓰기 시작했던 것은 중학교 때 <퇴마록>이라는 소설을 읽고 나서였다. <퇴마록 : 세계편>의 마지막 권을 덮으며, 나는 완결된 것 같지 않은 이야기의 마지막 때문에 한참을 괴로워했다. 몇 날을 그들의 생사와 앞날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다가 나는 처음으로 무지 노트를 펼쳐 이야기를 적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의 마지막을 채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쥐어짜며 노트에 빽빽하게 이야기를 채웠고, 등교하면 반 아이들이 그 노트를 돌려 읽으면서 그 날 이야기의 마지막에 ‘그래서 다음엔 어떻게 돼?’ 같은 짧은 감상을 써서 돌려주곤 했다. 그땐 그게 너무 재밌어서, 쉬는 시간이고 수업 시간이고 가리지 않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데 열중했고, 아이들이 ‘재밌다’고 말해주면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이 지루한 이야기를 어째서 <프랭크> 영화 감상의 초입에 구구절절 떠들고 있냐면, 프랭크를 보는 내내 나의 글쓰기에 대해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나는 그렇게 글쓰기를 좋아하면서 진학할 때도 글 쓰는 것과 거리가 먼 법학과에 들어갔고,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나의 재능’에 대한 확신이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세월이 쌓이면서 글을 쓰는 재주는 천천히지만 분명히 늘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좋은 글을 보는 눈도 함께 늘었다. 그 간격이 점점 벌어지는 것이 힘들었고, 내가 쓴 소설은 재미가 없었다.
<프랭크>의 주인공 존은 음악을 하는 사람이다. 따로 가지고 있는 업이 있지만, 하루 종일 음악을 만드는 것에 열정을 쏟아붓는 사람이다. 책꽂이에 나란히 진열된 믹스 테이프들이 그의 오랜 음악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끊임없이 곡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곡들이 구리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한다. 그러다 우연히 프랭크를 만난다.
이 영화 속의 프랭크는 말 그대로 사기캐다. 주변의 사소한 것들을 관찰하고, 그것들에 영감을 얻어 금세 끝내주는 노래로 만들어 낸다. 음악적인 천재성은 물론이고, 사람 사이의 관계 역시 완벽하다. 모두의 중심에는 프랭크가 있고, 프랭크는 사람의 마음을 보듬을 줄도 안다. 프랭크가 가진 유일한 단점은 머리에 뒤집어쓴 말도 안 되는 ‘탈’ 뿐이다. 절대 벗지 않는 가면. 존은 처음 프랭크를 보는 순간부터, 어린 시절의 어딘가에 상처 받은 기억이 프랭크로 하여금 가면을 벗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그 극한의 상황이 프랭크가 곡을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준다고 생각한다. 그 극한의 상황은 ‘캔자스 블러프’로 명명된다. 캔자스 블러프는 프랭크가 나고 자란 곳이다. 존은 끊임없이 자신 만의 ‘캔자스 블러프’를 갖기 위해 애를 쓴다. 어린 시절 그곳에서 프랭크가 상처 받았 듯, 자신에게도 특별한 경험이 찾아와 주길 바라면서. 남들의 눈에 미친 짓에 불과한 가면마저 존에게는 프랭크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들 중 하나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나 역시 그 느낌을 안다. ‘특별함’을 가진 사람을 만났을 때에 드는 마음. 너무 반짝반짝 거리는 특별한 사람을 옆에서 보다 보면 조금이라도 더 친해지고, 조금이라도 더 공통점을 만들려고 안달을 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될 거라는 생각까지 차마 하지 못하지만 그 ‘특별함’이 가루처럼 나에게 묻어 나도 그 비슷하게는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내가 가진 평범함에 치를 떨게 된다. 나의 자존감이 마구 바닥을 치는 순간이다. 내가 그 순간을 견딜 수 있는 건 아마 스스로 글 쓰는 것을 취미로 규정지어 놨기 때문일 것이다. 내 열망이 최대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취급하며,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럴듯한 핑계 삼아 나는 그 순간을 모면한다. 모면하지 못했다면 영화 속 돈이나 루카스 같은 끝도 없는 절망을 느꼈을 것이다. 물론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진 않았겠지만.
결국 존은 프랭크의 부모에게 어린 시절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다. 돌아오는 답은 ‘아무것도 없었다.’였다. 화목한 가정이었어요. 존은 그러자 멍한 얼굴로 말한다. ‘우리 집도 그랬다.’ 고. 음악의 천부적 재능이 프랭크의 아픔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온 것이다. 어떻게든 얻으려 했던, 극한의 고통은 사실 원하는 음악적 재능을 얻기 위한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정신병과 별개로 프랭크는 천재성을 타고난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존의 마지막 동아줄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재능이 없는 스스로를 변명해주기 위한 눈가리개 같은 것. 종국에는 그것이 썩은 동아줄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지만,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프랭크는 존의 노래에 손뼉을 마주쳐준다. 프랭크가 하는 Amazing 같은 칭찬들을 들으며, 존은 점점 자신감을 가진다. 그 칭찬들은 존에게 기폭제가 되어 점점 작곡하는 것에 자신감을 갖게 된다. 하지만 결국 SXSW에서 프랭크는 곡이 구리다는 말을 남기고 쓰러진다. 그 장면을 보며 나는 순간 너무하다는 원망, 그 비슷한 감정이 들었다. 프랭크가 억지로 맞춰나가고 있다는 것은 마이클 패스벤더의 연기로 느낄 수 있었지만, 그러니 애초에 왜 존의 장단에 춤을 춰줘서 사람을 들뜨게 만드냐, 같은 원망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마음인 것이다. 그러다 생각을 했다. 어쩌면 존 역시 프랭크에게 있어,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처음 존이 키보드를 대신 연주하던 그때부터, 프랭크는 존을 고상한 사람으로 눈여겨보았다.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존이 프랭크에게는 반짝반짝 빛나는 누군가였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건 그저 나의 생각일 뿐이고, 프랭크가 무리를 하면서까지 존의 계획에 동참한 이유는 그저 스스로의 인정 욕구를 채우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다. 영화에서 말했던 그대로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을 처음 만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건 프랭크 역시 무언가에 도전했고, 그 도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서 이 영화가 주는 교훈이 안분지족(安分之足), 네 주제를 알라라는 말은 아니다. 그저 내 개인적 경험이 주는 감상이었을 뿐. 프랭크는 가족 같은 밴드의 품으로 돌아갔고, 존은 모른다. 어쩌면 나처럼 혼자 떠들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노래를 그저 올릴 수 있는 것에 만족하며 살 수도 있고, 모처럼 늘어난 트위터 팔로어들을 보며, 그들에게 얻는 피드백에 만족하며 살 수도 있다. 아니면 이제 다시는 노래를 만들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영화의 개봉을 꽤 오랜 시간 기다렸고, 보러 가기 전엔 보자마자 감상문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니 왠지 먹먹해지며, 떠오르는 내 생각들을 타이핑하는 것이 저어되었다. 지나치게 복잡하고, 구구절절하며, 구차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뭐, 다 적고 나니 그냥 그런 흔한 이야기가 되었지만.
영화에 별점을 주자면 ★★★★ 별 네 개. 존은 동의하지 않았지만, 영화에서 프랭크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위한 노래라며 부르는 이상한 단어 나열 같은 노래는 영화를 보고 나온 몇 시간 동안 귓가에 맴돌았다. <Begin Again> 보다 되려 OST가 더 내 취향에 가깝다. 가면을 뒤집어쓰고 사는 Frank와 특별해지고 싶은 Jon(John)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