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초 Jun 26. 2021

얌전히 나대기

스타트업 정직원과 인턴, 그 애매한 사이에서

자리가 옮겨졌다.

한 달 사이에 두 번이나.


나의 첫자리는 최고 마케팅 책임자(CMO), 엘라 님 바로 옆자리였다. 어깨너머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는 최고의 자리였다. 인턴 오피스가 따로 있지만, 메인 오피스의 직원 분들과 싱크를 맞추며 일해야 하는 업무를 맡은 나는 메인 오피스에서 일하게 된 유일한 인턴이었다. 몇 주 후, 주니어 마케팅 매니저분들이 회사에 새로 채용되시면서 일개 인턴인 나는 경영 지원실 자리로 옮겨야 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경영 지원실에도 HR 담당자분이 새로 들어오시게 되시면서 내 자리는 또 한 번 옮겨졌다.


서운하거나 억울하다거나 하진 않았다. 내 타이틀을 잘 알고 있으니까.

난 회사에서 가장 어린, 대학을 졸업하지도 않은 재학생 인턴이다. 일자리 구하기 더욱 어려워진 코로나 시국에 열일할 기회가 주어진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치열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신나게 일하고 있다. 오늘은 또 어떤 수많은 'Why?'라는 질문을 던지며 시야를 넓힐까!


며칠 후.

아침에 출근하니 내 자리는 이미 싹 치워져 있다.

"민근 님, 자리가 없으니 당분간은 라운지에서 일하셔야 해요..."

'읭?'

 궁금해할 틈도 없이 매우 난처해하는 담당자분 표정에 영문도 모른 채 '아, 네~' 하고는 데스크탑에 붙여져 있는 내 이름표를 뗐다. 아침부터 이런 통보를 들으니 괜히 뭔가 뺏긴 것 같아 청개구리 심보가 꿈틀대며 순순히 자리를 바꾸는 게 싫어진다. 느릿느릿 짐을 챙겨 비어있는 라운지 테이블에 털썩 앉았다. 다시 자리 세팅을 하는데, 대표님 (이하 카이 님)이  '쫓겨난' 인턴 앞에 앉으셨다.


"아이고~ 라운지로 쫓겨나서 어떡해~ 이름표 붙여 놓을 데스크탑도 없고~ 이름표를 이마에라도 붙여줄까? "


대표님과의 첫 1:1 자리였다.

먼저 찾아와 말을 걸어주시니 위로가 필요한 일도 아니지만 위로가 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면 상대방이 궁금해져 내가 종종 물어보는 질문이 있다. "What's your history?" 지금의 당신은 어떻게 지금의 당신이 되었는지에 대한 호기심. 직원으로 시작해 삼성, 현대, CJ, 맥킨지 컨설팅 등 글로벌 회사들의 임원직을 휩쓴 생각지도 못한 과거를 들을 수 있었다. 세포라, 카카오, 신세계, 빅히트 등 대기업에서 원하는 AI서비스를 제공하는 IT 회사를 가꾸는 CEO 뒤의 치열한 과거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었다. 어떻게 비즈니스적으로 좋은 기회들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고 또 그 자리에 걸맞은 실력을 제때 보여 줄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답변도 해주시며 지금까지 만난 좋은 보스들, 그리고 멘토와 롤모델의 차이도 얘기해주셨다.


"열심히 해~" 하고 자리를 떠나시는데 나는 카이 님처럼 일할 때의 생각과 삶에 대한 태도가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카이 님 곁에 내가 따먹고 싶은 과일들이 무척 많았다. 짧고 굵은 이 대화는 라운지로 '쫓겨난' 인턴에게 인턴으로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다 배우고 더 많은 동료 직원분들과 더욱 다양한 아이디어를 소통하고 배우고 싶은 열망을 더욱 차오르게 했다.




나는 다양한 사람의 아이디어가 필혁되고, 그에 대한 예리한 피드백이 자유롭게 오가는 뜨거운 실무 현장의 마케팅 회의를 참석하는 유일한 인턴이기도 하다. 99도까지 차올라 있던 그 열망을 100도로 올려 끓게 만든 상황이 있다.


회의 막바지, 엘라 님이

"새로 오신 분들도 많아졌고 회사 마케팅 메시지를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목요일에 카이 님이 진행하시는 마케팅 워크숍 일정이 잡혔습니다. 오늘 회의 참석하신 분들은 모두 오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셨다.


마케팅 워크숍이라니! 심지어, 카이 대표님의 경영 철학, 생각, 가치를 더욱 세세하게 들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잖아! 나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곧이어, 엘라 님은

"민근 님 아까 여기 어디 앉아 계셨는데... 어디 계시죠?"


"네! 저 여기 있습니다!!"

미팅 책상 맨 끝에서 끝으로 잘 들리게 크게 대답했다.


"민근 님 워크숍 참석하는 것에 대해선 한번 더 컨펌하고 알려 드리도록 할게요."


'인턴'이라는 내 타이틀이 수면 위로 두둥실 떠오르는 순간이다.


"넵."



어떻게 보면 일개 인턴이 마케팅 매니저들을 위한 실무 워크숍을 참가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 아무나 갈 수 있는 건 아니겠지... 회사의 철학, 마케팅 전략, 실무 데이터 등이 오가는 중요한 일급비밀 정보들이 넘쳐날 테니까.'


그런데, 내 머리에서는 계속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다. 더 많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곧 '난 아닌 거야... 주어진 업무나 잘하자...'하고 눈 앞에 놓여있는 노트북을 들여다보는데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 순간, 거짓말같이 라운지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계시는 카이 님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말씀드려볼까? 좋은 타이밍일까? 가볍게 여쭤보는 건 괜찮겠지'와 '아냐, 고작 인턴 주제에 나대지 좀 마!!' 사이에서 무척 갈등하는 순간이었다.


스무 번도 더 생각하다가

아, 몰라!!!!


가방에 있던 귤 맛 킷캣 (나름 아껴 먹었던 리미티드 에디션 초콜릿이었다)를 꺼내 쥐고

"카이 님, 초콜릿 드실래요?" 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


"오우! 당연하지. 고마워~"


"네~ 카이 님, 근데요.......

오늘 마케팅 회의에서 이번 주 목요일에 마케팅 워크숍을 하신다고 들었는데,

제가 그 워크숍에 참ㅅ..."


"그래. 와도 되지!"


"에? 진짜요?"


"응~ 그게 얼마나 스타 강사 강의인데~ 듣고 싶음 와도 돼."


"오~ 또 누가 강의하는데요?"


"내가!"


ㅋㅋㅋㅋㅋㅋ


곧 카이 님 휴대폰 전화가 울렸고, 나는

"감사합니다!" 외치곤 (속으로는 신나게 환호성을 지르며) 자리로 돌아왔다.


그 이후론, 일에 집중이 잘돼서 신나게 일했다. 하하




워크숍 당일 아침, 내게 언제 어디로 오라는 정보를 알려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아니, 내가 오는지도 모르는 분위기였다.

하... 이렇게 인턴의 꿈은 무너지나요......

이걸 또 누구한테 물어보기도 뭐하고, 가만히 있다간 내가 참석하는 줄도 모르시니 모두가 그냥 떠나버릴 것 같아 또다시 초조해졌다. 결국, 나는 업무 하다가 해결 못한 하나의 질문에 2-3개의 질문을 더 만들어서 메인 오피스의 사수, 유키 님을 찾아갔다.


얌전히 나대기로 결심한 것이다. 내가 먹고 싶은 과일을 따먹기 위해서.


유키 님은 엘라 님 바로 건너편 자리였다.

평소보다 조금 더 높은 톤으로 이것저것 질문하며 나의 존재감을 온몸으로 나타냈다.ㅋㅋ


"민근 님!"


엘라 님이다.


"워크숍 가는 거죠? 카이 님한테 가고 싶다고 말했다면서요."


시크한 엘라 님의 목소리는 나의 '나댐'을 조용한 오피스에 널리 널리 퍼트림과 동시에 정적을 깼다.


"아, 민근 님도 가요?"

유키 님이 눈 동그랗게 뜨시면서 나를 쳐다보신다.

정말 낯 뜨거워졌지만 태연한 척하며,


"네, 그런데 카이 님이랑 그때 얘기 나눈 뒤에 자세한 정보 받은 게 없어요."

"그럼 이따가 유키 님이 민근 님 챙겨서 같이 2시에 워크숍 가는 걸로 해요."


휴.

나는 이제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밖엔 비가 시원하게 내리고 있었다.



기다렸던 2시.

직원분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사무실을 떠나기 시작했다.

서울 숲에 위치한 카이 님 집으로 간다고 했다.

에??? 마케팅 워크숍을 대표님 집에서?

20-30명 직원들을 수용할 공간이 있나...?

직원분들이 대표님 집에 갈 정도로 자유롭고 열린 분위기의 회사라는 사실에 놀랐다.

(나중에 들어 보니, 카이 님 집에서 노래방 기계 틀어놓고 직원들과 와인 파티 및 핼러윈 파티를 종종 여시기도 한다고...)


유키 님과 엘라 , 다른  직원분과 함께 성수동으로 향했다. 카이 님의 집은 발아래 한강이 흐르고 남산 타워와 잠실 롯데 타워가 모두 보이며 서울 전경이 감싸 앉고 있었다.


'이런 곳은 언제 와보나?' 했는데 벌써 와있었다.


우연히 슈퍼주니어 멤버와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이 빌딩엔 방탄소년단 정국, 소녀시대 써니, 크러쉬, 배우 서강준, 축구 선수 손흥민 등 많은 공인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시카고 미술관에서 봤던 미술 작품이 걸린 긴 복도를 지나 왼쪽으로 도니 88인치 거대 TV 앞에 앉아계신 카이 님이 보였다.


제일 좋아하는 달다구리 청포도 와인, 모스카토 한 잔과 함께 아기다리고기다렸던 대망의 마케팅 워크숍이 내 앞에 촤르르 펼쳐졌다. 장장 4시간 동안 마구 쏟아지는 실무 데이터, 인사이트와 조언들을 쉴 새 없이 적어 내려갔다. 다양한 시각이 더해지며 아이디어와 영감이 번뜩이고 내가 쉽게 경험하지 못할 경험들을 간접적으로 들으며 눈썹이 올라가고 눈이 동그레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케팅을 또래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아는 건 새발의 피였다. 내가 아는 정보도 저렇게 소통할 수 있구나, 저런 방법으로 풀어낼 수 있는 솔루션이구나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구름 위에서 듣는 듯했던 마케팅 강의는 돈 내고도 얻지 못할 백만 불짜리 경험이었다. 정말 유익해서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계속 앉아 있어 허리가 너무 아프다가도 실제 기업들의 현재 실무 사례와 데이터, 업계 동향의 의미, 더 나아가 삶의 이유, 일을 할 때의 태도, 워크 마인드 셋 같은 카이 님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조언들을 얻을 때면 정신이 번쩍 들며 행복하게 인사이트를 쌓아갔다.


마케팅 워크숍 중 쉴 새 없이 적어 내려 갔던 메모장.


"자, 오늘 워크숍은 여기서 끝!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아서 자유롭게 시간 보내는 걸로. 해산!"


또 내적 갈등이 시작됐다.

'인턴이 이런 고오-급 강의 들었으면 됐지, 뭘 또 남아있어...'와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긴 아쉽잖아... 찐 대화(?)는 이제 시작될 것 같은데...' 하는 또 다른 갈등의 순간 말이다. 이렇게 '인턴'이라는 내 타이틀 때문에 선뜻 무언가를 하기에 주저할 때가 많았다. 자신을 관계 혹은 특정 공간 속, 어떻게 어떤 자리로 positioning 하느냐가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는 또 한 번 얌전히 나대기로 한다. '이게 될까?' 하고 생각하기보다 '되겠지, 안됨 말고'라고 생각해보려 한다. 안 해보고 후회하는 것보다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낫지 않은가!

난 목이 마르지도 않은데 물 한 잔을 찾으며 키친 바에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고 계시는 유키 님과 엘라 님 그룹에 자연스레 껴본다. 여기서도 나의 단골 질문 "What's your history?"로 흥미로운 대화를 이끌어간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이 회사를 스마트하게 가꾸고 있는 다양한 직원 분들과 얘기할 수 있었던, 내가 생각했던 그 '찐 대화'의 자리였다. 그저 사무실에서 묵묵히 주어진 일 해내는 직원의 이미지와는 또 다른, 각자의 흥미로운 스토리가 있었고 새롭게 배울 점이 많았다. 어떻게 지금의 일은 시작하게 되셨는지, 이 일이 좋은지, 왜 좋은지, 이전엔 어떤 일들을 해보셨는지에 대한 그들의 히스토리가 신선하게 다가왔고 참 멋졌고 대단했다. 지금 막 사회를 접한 나에게, 아낌없이 조언 또한 해주셨다. 내가 좀 쫄아있었던 걸(?) 어찌 아신 건지 (실제로 하고 싶으신 말씀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쫄지말고 '뽑아먹을 수 있는 것 다 뽑아 먹고 배우라'라고 하셨다. 그중에서, 콘텐츠 팀의 죠지 님과 대화 중,  '민근 님이 이런 자리에 올 수 있었던 건 그만큼 자격이 있어서에요. 민근 님이 일하는 방식이 맘에 들었다는 거지~' 하는 말씀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다. 선을 넘는 일을 한 거 아닌가 하는 사회 초년생의 마음을 알아주셨다.


각자가 생각하는 '위대한 일'의 정의는 다르겠지만, 위대한 일은 분명한 의지가 있을 때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나, 참 얌전히 잘 나댔다!


다른 사수분께서 내가 열정적으로 대화하는 모습이 인상 깊어서 찍었다고 보내주신 사진


내가 느낀 엘라 님의 부드러운 카리스마 포스 ^.^




작가의 이전글 도시의 순간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