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일, 생장 - 론세스바예스 24.2km
8월 2일 이른 아침. 피레녜를 넘어
잔뜩 긴장했는지 피곤했음에도 아침 5시에 눈을 떴다. 6시간 조금 못되게 잤나 보다. 사실 알베르게라는 것이 쾌적한 숙소는 아니다. 낡은 헛간 같은 건물에 다닥다닥 이층 나무 침대가 놓여 있었다. 공기 때문인지 마당으로 통하는 문을 밤새도록 열어두었고 덕분에 배가 잔뜩 부른 모기들이 벽에 붙어 있었다. 아직 아무도 일어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침대 안에서 글을 마저 쓰며 사람들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6시가 되어서 각자 알람이 울리고 하나 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짐을 싸서 숙소를 나서니 6시 20분이었다. 아직 둥근달과 밝은 별이 새벽하늘에 걸려 있었다. 프랑스 길은 첫날이 가장 힘들다는데 과연 괜찮을까 걱정이 들었다. 한 시간여 걸으니 드디어 어슴푸레 하늘이 밝아왔다.
힘들게 좀 더 올라가니 오리손 산장이 보였다. 생장에서 산장까지 구간도 수월하지 않다. 물병을 채우고 화장실도 들렸다. 해가 올라왔으므로 선크림을 바르고 모자와 장갑을 꺼내 착용했다. 어제 오리손에서 숙박하고 출발한 사람들이 보였다. 여기서 출발하는 사람들이 조금은 부러워지는 순간이다.
날씨는 쾌청했고 한줄기 외로운 길이 피레녜 산맥 깊은 곳으로 실타래 풀리듯 술술 이어졌다.
평화로운 초지위에 뭔가 음악이 들려오면 그것은 워낭이다. 가축들이 한입 가득 풀을 뜯으며 고개를 저을 때마다 뎅그렁 뎅그렁 소리가 정겹게 울려 퍼졌다.
길이 점점 가팔라졌고 샤를마뉴와 나폴레옹이 괜히 영웅이 아니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한국인답게 빨리빨리 걸으며 많은 사람들을 앞질렀다. 사람들을 지나칠 때 항상 봉쥬흐, 굿모닝, 올라, 부엔 까미노 네 가지 인사를 하였고 몇몇 분들과는 짧거나 꽤 긴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다. 어제 오리손에서 묵었다는 헝가리 아주머니는 여러 경로의 순례길을 열 번도 넘게 걸었다 했다. 이게 건강의 비결이라고 하며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병원을 들락거리는 신세가 되었을 거라 한다.
캐나다 출신 폴은 캐나다군과 영국군에서 근무하였고, 바로 2주 전까지 우크라이나군에 있었다고 한다. 상황이 어떠냐니까 전쟁이란 처참한 거라고 한다. 폴은 곧 무거운 배낭에 깔릴 것만 같았다. 구급낭과 수통이 달린 탄띠도 차고 있었다. 뭐가 배낭에 잔뜩 들었는지 물어보니 캠핑용 깔개며 온갖 쓸데없는 것을 다 가져왔다고 한다. 내 가벼운 행장을 보며 무척이나 부러워했다. 더구나 그 와중에 두꺼운 가이드북을 꺼내 읽으며 걷고 있었다. 부엔 까미노 앱을 다운 받으라고 가르쳐 줬더니 너무 좋아했다. 곧 폴은 책을 버릴 듯하다.
국경 바로 앞에 샘이 있고 롤랑의 샘이라 쓰여있다. 롤랑의 노래에 나오는 그 롤랑이 맞다.
여기서 잠시 요기를 하고 스페인으로 넘어갔다. 이제 스페인의 나바라 지방에 들어섰다. 나바라 왕국에서 유래한 이름이고 바스크 지방과 나바라 왕국의 역사는 나중에 따로 다룰까 한다.
우리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프랑스의 마지막 왕가 부르봉 왕조가 바로 나바라 왕국의 혈통이다. 그러니 나바라 왕국도 당당한 중세 유럽 역사의 메인 플레이어 중 하나였던 것이다. 거의 800년이나 이어졌고, 어떤 역사가들은 부르봉 왕조 치세까지 합쳐 천년의 역사로 평가하기도 하니 다른 열강의 역사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
내리막길에선 나뭇가지를 지팡이 삼아 내려왔다. 제법 내리막 경사가 급해 발과 무릎을 아껴 써야 하는 구간이 있다. 가급적 등산 스틱 사용을 고려하셔야 한다.
쉬다가 놓친 헝가리 아줌마를 다시 만났다. 누군가와 이야기 중이었는데, 작년 순례길에서 만났고 올해 또 만난 사람이라 한다. 자꾸 오면 나도 저분들을 다시 만날지도 모르겠다. 우린 상당히 좁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 순례를 시작한 첫날에도 이상한 일들이 주위에서 자꾸 벌어지고 있었다.
다시 론세스바예스 앞에서 폴을 따라잡았다. 예약해 둔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12시 정각이었다. 5시간 40분 만에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한 셈이다. 아직 체크인은 시작하지 않아 벤치에 앉아 기다리며 적당히 시간을 보냈다. 폴은 예약을 하지 않았고 체크인에 쓸 현금이 없다며 다음 마을로 떠났다. 이 마을에는 ATM이나 가게가 없다.
1시 30분이 되어서 체크인이 시작되었다. 봉사자 분들이 너무 친절했다. 그리고 알베르게 시설이 놀랄 정도로 관리가 잘 되어있었다. 어떻게 백수십 명에 이르는 투숙객을 매일 치러 내는지 불가사의할 따름이었다. 샤워와 빨래를 한 후 주방에서 컵라면을 하나 먹으니 극락이 따로 없었다. 주방엔 취사도구가 있고 물도 끓일 수 있으니 하나 꼭 챙겨가시길.
빨래 널고 나서 멍 때리고 앉아 있는 게 이리 즐거울 일이던가. 벤치에 앉아 하나둘 도착하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여유를 만끽했다.
규모가 크니 알베르게는 상당히 넉넉하다. 예약을 안 했어도 되었지 싶다. 물론 도착시간이 늦는다면 안전하게 예약하시길 바란다.
예약 확인에 관해 질문이 많은데, 걱정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체크인 관리는 상당히 잘 된다. 전자여권 리더기를 갖추고 있고, 여권 긁으면 예약자 명단, 입금내역까지 빠르게 확인 가능하다. 나도 확인 메일 못 받았는데 아무 문제없었다.
저녁까지 사람들이 계속 도착하였는데 마지막까지도 빈자리가 많이 남아 있었다. 물론 성수기에는 조금 다를 것이다.
저녁으로 예약해 둔 순례자 메뉴를 먹으러 론세스바예스 호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오늘의 메뉴는 첫째로 파스타나 수프, 둘째로 돼지고기나 생선, 마지막으로 디저트가 나왔다. 그리고 자리마다 로컬 와인 한 병이 놓였다. 순례자 메뉴는 이처럼 대개 3코스가 기본이다.
와인이 한 바퀴 돌고 음식이 나오자 다들 표정이 밝아지고 말문이 트였다.
아일랜드에서 온 메리는 초등학교 교사라 하였다. 사실 어제 같은 방에서 묵었는데 데면데면했었다. 하루를 걷고 동지애가 좀 생겼는지 오늘은 이런저런 이야기가 곧잘 오갔다. 그런데 어디로 갔는지 메리 사진이 없다.
만약 론세스바예스에서 묵는다면, 순례자 저녁을 신청해서 먹기를 권한다. 아직 서먹한 상태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좋은 기회가 되며, 여기서 만나 사귀는 사람을 꽤 길에서 오래 보게 될 수도 있다.
이때는 상상도 못 했지만 이들 중 한 명과 마지막까지 함께 하게 된다. 훗날 사진을 정리하면서야 이날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즐거운 식사가 한 시간이나 이어졌다. 바깥으로 나오니 마침 성당에 순례자 미사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순례자를 위한 강복이 있으니 한번 참석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순례자들을 앞으로 나오라 하고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축복을 빌어주신다.
나는 종교가 없고 스페인어를 알아듣지도 못하지만 느낌적인 느낌 때문인지 기분이 묘해졌다. 어디선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사까지 마치면 이제 론세스바예스에서 마지막 할 일이 남았다. 비로 통금시간까지 한잔할 차례이다. 동네 바르에 들러 스페인 대표 칵테일 샹그리아를 시켜보자.
바르는 하루를 무사히 마친 순례자들로 시끌벅적하였다.
열 시 통금은 절대 놓치지 말자. 알베르게에 못 들어가면 노숙을 하거나 아니면 입구에서 엄한 수녀님의 얼굴과 마주쳐야 할지도 모른다.
06:20 - 12:00
생 장 삐에 드 뽀흐 - 론세스바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