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차, 나헤라 - 산토 도밍고 델 라 칼사다 20.7km
8월 10일 아침
오스피탈레라가 내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얼른 시계를 보니 7시 10분이었다.
어젯밤 와인을 몇 잔이나 마셨음에도 새벽까지 눈은 말똥말똥했고 침대 속에서 이런저런 처리할 일들과 잡생각에 뒤척거렸다. 로스 아르코스에서 만난 오스피탈레라 헬레나가 병원으로 실려간 럭키씨의 소식을 때때로 전해오고 있었다. 새벽 3시까지 기억이 있고 그다음은 나도 모르게 잠들었는데 그대로 네 시간쯤 아주 깊게 잤다. 몸이 한결 개운해졌지만 벌써 해가 떠버려 걱정이 앞섰다.
오선생님은 밴드 위에 쓴 편지를 남겨두고 먼저 떠나셨다. 너무 곤히 자서 깨우지 않고 간다는 내용이었다.
오늘 갈 길은 20km 남짓이지만, 평소보다 두 시간은 늦게 출발하는 탓에 괜히 마음이 바빴다.
어제 내내 친절했던 오스피탈레라가 빗자루질을 하며 배웅해주었다.
이미 다른 이들은 전부 떠났고 내가 마지막이었다. 막 문을 나서려는데 그녀가 갑자기 좋아하는 노래를 물어왔다. 어리둥절했지만 냇 킹 콜의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라고 했더니 한곡 듣고 가라며 애플 뮤직을 검색해서 틀어주었다. 음악에 맞춰 슬쩍 춤을 권했는데 스텝을 모르시는 것으로 보아 스페인 분이 아닌 것 같았다. 물어보니 역시 미국 출신이고 봉사 중이라 하였다. 이름은 알리사이며 순례자들을 지키는 외에 틴토 데 베라노 tinto de verano 제조법을 전파하는 임무도 맡고 있다. 레시피를 배워서 어제 저녁에 참 잘 써먹었다. 최근에 결혼했다는 소식을 인스타그램에서 보았다.
발걸음을 서둘렀다. 마을 바깥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클라우디아를 만났다. 무릎이 계속 악화되어 배낭은 동키로 보냈다고 했다. 천천히 걸어서라도 산티아고까지 가겠다 하는데 오늘은 몇 시에 들어오실까 걱정스럽다.
아소프라에 들어서서 새끼 고양이 무리를 만났다.
그리 멀리 가지 않아 오선생님을 따라잡았다. 걸음이 무겁다. 배낭도 몹시 무거워 보인다. 휴식도 중간중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시레냐 Cirueña로 향했다. 이분은 상당히 이성적이고 냉철한 캐릭터다. 독서량이 상당하신 듯 이런저런 책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좋았다. 어제 저녁을 먹으면서도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대해 들었었다. 중학교 다닐 때 학교 도서관에서 읽었던 책이다. 지금은 책 내용을 거의 잊어버렸고 유명한 사건정도만 기억이 나지만 그 안에 로마인들이 이베리아 반도로 진출했던 대목도 다루었던 모양이다. 앞으로 만날 도시들에 로마 유적이 남은 곳이 있다 했다.
모두가 사진으로 남기는 시레냐의 바로 그 자리다. 헉헉대며 언덕에 올라서면 탁 트인 멋진 광경이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다. 다들 순간적으로 말을 잇지 못하고 홀린 듯 바라보게 된다. 한줄기 순례길이 서쪽으로 서쪽으로 이어지는 이 모습이 기억에 많이 남았다.
칼사다에 가까워지며 커다란 해바라기 밭이 보였고 여기서 유르겐 아저씨를 따라잡았다. 다들 아이처럼 좋아하며 해바라기꽃 속에 파묻혔다.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봄을 포기하지 않듯, 우리 순례자들도 산티아고로 가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1시가 가까워서 칼사다 마을로 진입했다. 거리가 깨끗하고 사람들이 굉장히 여유 있어 보였다.
공립 알베르게에 들어왔다. 가격은 13유로.
쾌적하고 쉬기 좋은 곳이다. 휴게실과 식당이 넓다. 푹신한 소파가 군데군데 놓여있어 블랙홀처럼 순례자들의 지친 육신을 빨아들였다. 그라뇽으로 갈게 아니라면 무난하게 여기서 쉬기를 추천한다. 규모도 크고 관리가 잘 되어 있다. 키친에 쿡탑이 없는 것을 빼고는 거의 나무랄 데가 없다. 뒷마당에도 벤치에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오늘 길에서 찍은 사진을 나누고 있었다.
체크인 - 샤워 - 빨래로 이어지는 노숙자 아니 순례자의 일과를 끝내고 바로 마을 구경을 나섰다. 근처에 있는 성당 매표소에서 세요를 받았다. 세요에는 재미있게도 산토도밍고 성당의 상징인 닭이 그려져 있다. 이는 닭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인데, 그래서인지 성당 내부와 공립 알베르게의 뒤뜰에서도 닭을 키우고 있다.
중세 시대의 순례길 안내서, 칼릭스투스 서책의 2권에는 순례길과 관련된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 칼사다에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옛날 옛적에 한 독일 순례자가 부모님과 함께 이 마을을 지나가다 생긴 일이라 한다. 이 순례자가 아주 훈남이었는 모양인지 마을의 한 처녀가 연정을 고백했지만, 이 독실한 청년은 고백을 거절하고 순례를 계속하려 하였다. 이에 이 처녀가 앙심을 품고 청년을 도둑으로 무고하여, 청년은 결국 감옥에 갇힌 후 사형이 언도되고야 말았다. 이에 이 청년의 부모님이 간절한 기도를 올렸고, 꿈에서 “너의 아들은 살 것이다.”라는 응답을 받았다고 한다. 재판장을 찾아가 이 꿈을 이야기하니, 재판장은 “당신 아들이 살 것이면 내 그릇 안에 닭고기도 살아 일어날 것이다.”라 비웃었고, 그러자 죽은 닭이 살아나 노래를 부르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칼사다의 닭은 이 기적의 닭의 후손들이며, 그중 일부는 아직도 성당의 성가대석에서 길러지며 노래를 한다 전해지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다.
수탉이 국조인 프랑스에서 온 순례자들은 이 도시를 각별히 생각하기도 하며, 닭의 깃털을 지니고 가면 몸 건강히 순례를 마칠 수 있다고 믿기도 한다.
이 전설을 듣고 나서인지 닭고기가 좀 당기긴 했는데, 페데리카도 마침 “우리 저 닭 잡아서 너깃 해 먹을까?” 라며 실없는 농담을 던져왔다.
여기를 지나가는 순례자 여러분들도 이 전설을 생각하며 저녁 메뉴로 닭고기를 골라보면 어떨까 한다.
상점에 들렀다 돌아왔다. 바로 앞 광장 카페에선 젊은 순례자 여럿이 맥주를 앞에 두고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금주를 위해 인사만 하고 들어왔다.
오선생님이 귀한 라면을 나누어 주셔서 저녁으로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었다.
20km 밖에 걷지 않아 평소보다 쉬운 하루였고, 덕분에 여유 있는 저녁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창문을 열어둔 침실엔 바람이 잘 통해 서늘하였다. 옆집에선 생일파티가 벌어지는지 음악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샤잠에 검색해 보니 마르따 세실리아 디아즈의 노래이다. 이렇게 가수 한 명을 새로이 알게 되었다.
En Tu Cumpleaños(Martha Cecilia Díaz 제공) https://www.shazam.com/track/470022680/en-tu-cumplea%25C3%25B1os?referrer=share
저녁 이후에는 성당 참석 프로그램이 있으니 리셉션에서 신청 후 가보는 것도 좋겠다.
7:30 ~ 12:50
나 헤라 ~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