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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번만 더 May 11. 2024

29. 까미노에서 꾸는 꿈

23일 차, 카카벨로스 - 오 세브레이로 36.6km

8월 24일



7시가 되기 전 길을 나섰다. 아직도 바깥은 어두웠다.



걷다 보면 아침이 밝아온다.



마르멜로, 퀸스, 유럽 모과, 혹은 털모과로 부르는 과일이 탐스럽게 익어갔다. 모과랑은 완전 다르지만 대강 모과로 번역된 존재이다. 대강 계피로 번역된 시나먼과 비슷한 느낌이다. 언뜻 보면 배나 사과같이 생기기도 했는데 생으로 먹기는 힘드니 굳이 딸 필욘 없다.



지금은 버려진 조형물들, 잠긴 문 창살 너머로 들여다본다.



토끼 가족이 후다닥 길 앞을 가로질렀다. 새끼들이 딸린 걸 봐선 굴이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다. 토끼 길을 따라가 보니 굴 입구 두 개가 보였다. 토끼똥이 주변에 흩어져 있는 걸 봐선 확실하다. 토끼굴 입구에 올무를 놓았었던 어릴 적 일이 떠올랐다. 그땐 죽음의 무거움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었고, 운 없게도 올무에 걸려 축 늘어진 토끼를 보며, 오직 성공의 기쁨과 수확물에 뿌듯했었다. 먹을 게 없었던 것도 아니었고, 토끼고기를 즐겼던 것도 아니었다.


매트릭스에서 나온 모피어스의 대사가 생각났다. 빨간 알약을 먹으면 토끼굴이 얼마나 깊은지 확인하게 될 거라던. 앨리스와 네오는 흰 토끼를 따라 뛰어든 토끼굴에서 해답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우릴 움직이는 것은 해답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우리가 느끼는 것은 과연 실재하는 것인가? 우리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감각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감각할 수 있기에 그 존재를 믿는다. 감각이란 과연 존재의 증거인가? 나는 우리 뇌가 착시를 보여주고 환청을 들려주기도 한다는 것을 안다. 아주 정교한 가상현실 안에 들어가게 되면 현실과 어떻게 구분해야 할 것인가.


천연향 분자를 본따 만들어 낸 합성 향료의 향을 맡으며, 어떤 것이 원본이고 어떤 것이 복제인지 구분할 수 있더란 말인가? 이제는 오렌지 향료가 진짜 오렌지보다 더 진짜처럼 느껴지고, 이것이 새로운 기준이 되어 계속 복제품이 생산되는 세상이다. 이데아에서 생겨난 그림자를 복제한 그림자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원본이고 무엇이 복제인지 말할 수 없다면 어떤 게 진짜이고 어떤 것이 허구인가?


네오도 장자도 앨리스도 꿈을 꾸고 있다. 누가 나비고 누가 장자인지 시시비비를 가리는 게 아무 의미 없다면, 결국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되고, 그 다음엔 우리의 선택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와 같은 잡생각을 하며 걸었다. 이러니 맨날 길을 잘못 들어 고생을 한다.


걷다 보면 논리도 없는 얼토당토않은 생각들이 무작위로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사라져 버렸다. 가끔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걷는 꿈을 꾸는 건지 진짜 걷는 건지 오만가지 생각과 함께 비야 프랑카 델 비에르소에 도착했다.


스페인 하숙을 여기서 찍어서 유명하다는데, 티브이를 보지 않는 나는 거기가 어디인 줄 모른다.


까리온에서도 심상정 씨가 묵었던 알베르게가 유명하다 그랬는데 굳이 찾아가 묵을 생각은 들지 않았었다.


이런 내가 외국 순례자들이 한국 영화 드라마 노래 티브이쇼 이야기하면, 스페인 하숙을 한번 보시라고 권하곤 한다. 정작 난 한편도 본 적 없으면서 그래도 되나 싶다.



마을에는 여기저기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었다. 사람의 손길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건물들이 많다.



9시쯤 마음에 드는 공원을 찾아 간식을 먹고 한 시간 정도 앉아 글을 썼다. Jardín de la Alameda이다. 좋은데 앉아 있으니 집중이 더 잘 되는 느낌적 느낌이다. 또 여기서 시간을 많이 썼으니 이따 오후에 고생할 건 분명했다.


오늘이 폭염의 마지막 날이라 했다. 예보에 따르면 내일부턴 급 쌀쌀해질 예정이다.



여기는 마을 전체에 다리, 수도원, 교회 등 볼거리가 많다. 밤 맥주를 특산품으로 내놓은 걸 봐서는 산촌에서 밤이 많이 나는 모양이었다.



마을엔 까미노, 샘, 쉼터를 정비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다음 달부터는 다시 순례 성수기가 되어 붐빌 예정이다.



비에르소를 지나고부터는 산세가 제법 웅장해진다. 그동안 스페인 산이 너무 밋밋하다고 한 게 무색하게, 여기서부터는 풍경과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다.


오르막이 시작되고는 매 2-3 km 마다 아담한 산촌 마을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바로 다음 마을의 카페에서 마시모와 페데리카를 발견했다. 잠시 쉬고 셋이서 출발~


벌채를 멈춰주세요


페데리카는 이미 지쳤는지 자꾸 쳐지고, 마시모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마시모를 먼저 보내고 느린 페데리카와 걷기로 했다. 로그로뇨를 앞두고 페데와 처음 함께 걸었던 날의 기억이 났다.



더위에 땀을 줄줄 쏟아내는 페데리카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오르막에 그만 정신을 놓아버렸다. 길 중간에서 자꾸 쉰다는 걸 다음 마을 카페까지만 가서 쉬자며 꼬드겨 계속 올라갔다.


까페에 두 번이나 더 들러 쉬며 천천히 라스 헤레리아스로 향했다. 기운을 차리기 위해 에스프레소 더블샷에 얼음을 시켜 섞어 마셨다. 그녀는 자꾸만 고맙다 말하며 마신 것을 전부 계산했다. “천, 넌 어떻게 항상 강한 거야?” 하고 페데가 물어왔다. “나도 아프고 약한데 굳이 말하지 않는 것뿐이야.”라고 대답해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페데와 라스 헤레리아스에 도착했고 잠시 쉬며 산 위를 올려 보았다. 내친김에 오 세브레이로까지 갈만한지 높이를 가늠해 보기 위해서다.


마시모와 페데리카는 오늘 여기서 묵을 예정이다. 마시모가 여기서부턴 경사가 더 급하다며 내일 아침에 오르라 하였다. 그래도 마음먹었으면 어서 가봐야지 10회 까미노 완주에 빛나는 마시모의 조언이지만 귓등으로도 들을 내가 아니었다. 가다가 힘들면 중간에 마을이 두 개 있으니 거기서 멈출 요량이었다. 나름 플랜 B가 있으니 호기롭게 오 세브레이로로 간다를 외치고 헤레리아스를 떠났다.


마시모의 말대로였다. 마을을 떠나자마자 오르막이 눈에 띄게 심해졌다. 그러나 산세와 경치는 더욱 좋아졌고 멋진 산속을 걸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라 파바에 도착해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고 샘에서 물을 받고 다시 출발했다.


오르막은 더욱더 급해져만 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울창한 숲 속으로 난 길을 간신히 간신히 짚어 올라갔다. 말똥 소똥 범벅인 바닥과, 얼굴로 달려드는 작은 파리들만 제외하면 더 좋았을 텐데, 이 세상엔 다 좋은 게 없다. 몰려드는 파리떼를 연신 손을 휘저어 쫓으며 힘들게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마다 한 번씩 손을 휘저어야 했고 손을 저으면 스틱을 못쓰므로 속도는 더욱 떨어져 갔다.



라구나는 소똥 냄새가 진동하는 마을이다. 소니아는 오늘 이 마을에 묵는다며 예약했는데 2km 더 가면 바로 오 세브레이로인 걸 체크 못했다고 했다. 마을 입구에 자판기가 서있는데 동전이 없어 지나쳐야만 했다. ​



드디어 갈리시아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경계석을 만났다. 여기가 라구나에서 오세브레이로의 절반 지점이다. 시간은 이미 5시 50분. 이제 1km 남았다.


15분을 더 걸어 6시 5분에 오세브레이로에 도착했다. 이렇게 빨리 와서 뭐 하려고 자꾸 이리 서두르는 걸까.


 

6시경 오 세브레이로 입구에 도달했다.



공립 알베르게에 들어왔다. 부츠 룸, 샤워, 빨래방이 -1층에 있고, 리셉션은 지상층에 있다. 경사지에 지어진 건물이라 앞뒤 입구의 층이 다르다.

물론 샤워의 수온 조절 스위치는 없고, 샤워장의 문도 없다. 여자 샤워실은 어떤지 모르겠다. 한번 물어본다는 걸 깜빡했다. 문이 없다는 데 대해 다들 충격받은 분위기긴 한데, 스포츠 팀이나 짐에서 단체 샤워해 본 사람들은 그냥 덤덤하고, 병역을 필한 한국의 남성이나 대중탕 문화에 익숙한 분이라면 또 그냥 그러려니 할듯하다. 주방 겸 다이닝룸은 널찍하나 주방 기구와 식기가 많이 없어 간단한 거밖에 못 해 먹는다.


마을의 규모에 비해 사람들이 많았다. 여기서부터 순례길을 시작하는 사람도 많고, 독특한 마을을 보러 온 관광객들도 꽤 있다. ATM과 상점이 하나씩 있다. 상점에서 마지막 하나 남은 빵을 얼른 집어 들었고, 살라미, 레몬 환타, 그리고 와인도 한 병 샀다.


알베르게의 분위기는 꽤 어수선했고, 처음 보는 얼굴이 많았다. 이미 산전수전 겪으며 여기까지 온 베테랑들 사이에, 아직 분위기 파악 못하고 신이 나있는 대학생들과, 한편 내일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살짝 불안과 흥분에 휩싸인 사람들까지 섞여있었다. 배낭을 놓아두는 것만 봐도 베테랑인지 초짜인지가 확연히 보였다. 베테랑들은 이미 내일 나가기 좋게 정리를 끝마친 상태, 까미노 신입들은 아직 침대커버도 씌워놓지 않았고 배낭도 어지러이 널려져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생장에서 왔다 하면 신기함과 존경이 섞인 눈빛으로 우러러봤다.


와인을 따고 틴토 데 베라노를 제조해서 새 얼굴들에게 돌렸다. 폰페라다에서 출발했다는 사촌지간 로베르토와 주제페에게 파스타를 한 그릇 얻어먹었다. 마드리드 출신의 마리오, 산티아고, 테레사는 친구 사이다. 내일이 순례 첫날이 될 거라 한다. 얘들도 마드리드 출신이라 그런지 스페인 출신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살라망카에서 왔다는 테레사와 카예따나 모녀도 내일이 첫걸음이다.


잠시 후 로렌조, 루까, 니꼴로 등 나와 20여 일을 함께한 이탈리아 꼬맹이들 중 몇이 자리에 끼었다. 이제 남은 거리와 구간은 너무 쉬운 거라며 연신 신입들을 안심시켰다. 이제 산티아고까지 30km를 넘는 구간은 없을 것이므로, 부르고스 이후 강행군을 이어온 우리에겐 너무 쉬워만 보였다. 하지만 내일부터 일주일여를 걷게 될 이들은 20km의 체감이 어떤지 아직 모른다. 생장을 처음 출발했을 때의 우리처럼.


주제페


6:50 ~ 18:10

카카벨로스 - 오 세브레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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