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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번만 더 May 09. 2024

28. 슬기로운 순례생활

22일 차, 엘 아세보 - 카카벨로스 36.6km

8월 23일


7시 20분에 엘라세보를 나섰다.



점점 새벽에 눈이 번쩍 떠지지 않는다. 순례도 새로운 일상이 되어 긴장이 풀리고 느슨해진 것이리라.



처음엔 얼마나 걸을 수 있을지 몰라 무조건 새벽 일찍 일어나 떠났었지만, 지금은 여유가 꽤나 생겼다. 그날 가야 할 거리에 따라 출발 시간도 조절하고, 조금 더 걸어볼까 생각이 들면 조금 더 가서 아무 데나 묵는다. ‘여기까지 못 가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버린 지 오래이다. 못 가면 못 가는 대로 거기서 묵으면 된다. 오래 걷는 것도 그리 두렵지 않다.



서쪽 사면이라 해는 보이지 않지만 이미 하늘이 훤하였다. 제법 급한 내리막인데 바닥은 돌이다. 이 모습은 인왕산 어디선가 본 듯하다.



프로미스타 가는 길에 처음 봤던 아르헨티나 아주머니다. 종아리에 메시 문신이 이젠 눈에 익었다. 어제 같은 알베르게에 묵었었다. ‘호날두 or 메시?’ 하고 물으면 항상 메시를 연호하신다. 느리지만 하루도 쉬지않고 늦게까지 걷는 중이다.



최대한 천천히 조심해서 경사를 내려왔다. 두 시간이나 걸려 무릎이 살살 아려올 때쯤에야 산 아래 몰리나세카에 당도했다.



몰리나세카는 첫눈에 보기에도 예쁜 마을인데, 예쁘다는 말로는 살짝 부족하다.


굳이 말하자면 소중하게 아껴두고 싶은 마을, 지나는 이의 발걸음을 붙잡는 곳이다. 나중에 뭔가 더 적절한 표현을 찾아봐야겠다.


찾아들어간 까페

라바날 델 까미노, 폰세바돈, 엘라세보, 몰리나세카로 이어지는 완소 라인의 마무리로 안성맞춤이다. 그냥 지나치기 아쉬워 여기서 좀 더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마을을 돌다 한 카페를 찾았고, 커피와 츄로스를 한 접시 시켜놓고 앉았다.



각국의 국기가 그려진 설탕을 랜덤으로 나눠주는 것으로 보였는데 유독 나에겐 태극기를 집어주었다. 이마에 한국에서 왔다고 쓰여있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알았어?”하고 물었더니 그냥 웃는다. 진짜 쓰여있는 모양이었다.


하나 집어먹어보니 바삭하니 맛있었다. 커피 + 츄로스 해서 2.70유로인가 했으니, 가격도 정말 혜자인 셈이었다.


기분이 좋고 장소도 마음에 들어 한 시간 정도 앉아 내키는 대로 글을 쓰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오늘도 오후의 날씨는 가히 살인적일 터, 여기서 시간을 보낸 대가는 나중에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었다.

아침에 걷기 시작할 땐 몸이 뻣뻣하고 발이 아파 속도가 안 나다가, 어느 순간 몸이 풀리며 다리가 가벼워진다. 이때부터 통증도 사라져 아주 빠르게 걸을 수 있는 상태가 찾아온다. 대략 8시부터 11시까지 세 시간 정도 된다.


최근에 느낀 점인데, 이 시간에 글을 쓰면 술술 잘 써진다. 생산성이 가장 높은 시간인 셈이다. 이번 순례가 끝나도 아침에 걷고 나서 글을 쓰는 루틴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잡생각을 하다 길을 벗어났지만, 여기에도 화살표가 있었다. 큰 문제없이 화살표를 따라 폰페라다 까지 왔다.



템플 기사단이 주둔하였다는 성이 아주 멋지다.


성에서 살짝 돌아간 곳에 순례자 사무소가 있고, 여기서 세요를 받았다.



그냥 지나가기 아쉬워 시내를 돌아보았다. 옛 흔적도 볼게 많지만, 뉴타운 쪽도 깨끗하고 좋다. 사람들이 상점에서 옷을 사고, 한가로이 노천카페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가게에서 과일을 잔뜩 사서 어제 못 먹은 한을 풀었다. 갈증이 나서 주먹만한 복숭아를 허겁지겁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과즙이 입가와 손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지만 체면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폰페라다에서 2시 반까지 머물렀다.



늦게 일어난 데다 몰리나세카에서 한 시간, 여기서 도시 구경에 한 시간 반을 보냈으니 이젠 뜨거운 오후의 고행을 할 차례였다.



도시를 벗어나며 특이한 모자를 주웠다.



표지판에 씌워주었다.



이미 세 시가 넘었다. 콜롬브리아노스를 지나 푸엔테스 누에바스쯤에서, 아침에 염두에 두었던 카카벨로스까지의 구글맵을 찍어 보았다. 구글맵이 차로는 15분 거리인데 걸으면 한 시간 하고도 40분 걸릴 거야라고 아주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물론 그럴 리가 없다. 꼬불꼬불한 까미노를 따라 걸어야 하고, 땡볕 아래 걷다 보면 시속 4km를 내기도 힘들거니와, 중간에 휴식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족히 세 시간은 더 걸어야 할 것이었다.


이미 온도계는 40도를 넘게 가리켰다. 누가 차를 세우고 너 이러다 죽는다고 빨리 타라면 못 이기는 척 타고 싶었다. 하지만 이맘 몰라주는 야속한 운전자들은 응원의 손만 흔들며 쌩쌩 지나쳐갔다.


공원에서 음수대를 찾던 중, 더위를 피해 쉬고 있던 구스타보와 지오바나를 만났다. 물을 마시고 잠시 숨을 돌렸다. 더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아 함께 길을 나섰다.


이제 이정표가 알리는 거리의 앞자리는 1로 변했다. 며칠 후면 세 자리에서 두 자리로 변할 것이다.


젖을 먹이는 고양이 가족을 만났다. 새끼들은 불안한지 눈치를 보다 한 마리씩 흩어지고, 빼빼 마른 아빠 고양이가 낮잠을 자다 말고 용감히 달려와 우리 주위를 맴돌며 살폈다. 불안할까 싶어 얼른 자리를 피해 주었다.  



이제 카카벨로스까지 30-40분 남은 거리까지 왔다. 발을 담그기 좋은 시냇가를 만나 한참을 쉬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물이 차가워 피로가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해가 구름 속으로 살짝 들어가 훨씬 걷기 좋아졌다.



41도까지 치솟았던 날이지만 무사히 카카벨로스에 도착했다.


카카벨로스 공립알베는 좀 특이하게 생겼다. 마당에서 침실 문을 열면 바로 침대가 보인다. 이층 침대가 아닌 것이 천만다행이다.



그리고 엄연히 2인 1실이다.



물론 샤워의 수온 조절 같은건 되지 않는다. 찬물을 틀면 찬물이 나와야 하는데, 날이 뜨거워 미지근한 물이 나오는 그런 샤워를 했다.



이 마을은 강가에 위치한 수영장이 유명하다. 근처에서도 피서로 많이 찾아오는 모양이다.



장도 볼 겸 마을로 나가는 길에 다리 위에서 다이빙하는 십 대들을 만났다. 겁도 없이 십 미터는 되는 데서 펄쩍 뛰어내린다. 물 하고 친하지 않은 나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알베르게에 전기포트와 마이크로웨이브밖에 없기 때문에 생존 파스타를 해 먹기로 했다.

장은 이렇게 봤다.



차례대로 바나나 4개, 크라상 5개들이, 체다치즈 슬라이스, 달걀 6개, 비프 버거 240g 한 팩(갈아서 동글게 뭉쳐 눌러놓은 패티 모양 고기), 절인 올리브 한 캔, 버섯 통조림 한 캔, 파스타 한 팩, 오렌지 주스 한 병, 볼로네즈 소스 한 병


합계 14.19유로



1. 전자레인지 사용 가능한 그릇 준비(오븐 그릇이면 좋다)

2. 파스타에 끓는 물을 붓는다

3. 면이 익을 때까지 돌린다.



4. 물을 따라내고 초리조, 참치캔, 민스드 비프(없으면 버거) 등을 취향대로 넣고, 버섯 양파 등 있는 대로 올린 뒤 소스를 넣어 섞는다.

5. 마지막으로 치즈를 올리고 고기가 익을 때까지 돌린다.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파스타 한 팩이 8-10인분은 충분히 되므로 양 조절을 잘해야 한다. 소스 한 병은 3-4인분 용이다. 전자레인지로 라면 끓이는 요령과 비슷하다.


구스타보, 지오바나와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둘이 와인과 소시지를 내왔다. 소시지를 큼직하게 썩썩 썰어 먹었다. 땀을 많이 흘려 그런지 짜디짠 소시지가 자꾸만 당겼다. 와인도 좋은 것을 가져온 덕분에 기분 좋은 저녁 식사가 되었다. 자취생이나 해먹을법한 요리라도 함께 나누어 좋았다.


7:20 - 18:15

엘라세보 - 카카벨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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