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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번만 더 May 08. 2024

27. 사라져 가는 것들

21일 차(2), 아스토르가 - 엘 아세보 데 산 미겔

계속해서 8월 22일 오후


폰세바돈을 2km쯤 지나면 철십자가 Cruz de Ferro 가 나온다. 많고 많은 십자가 중 여기가 제일 유명한 이유는 제일 높은 곳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물론 11세기부터 있었다 하니 오래되었기도 하다.)


나폴레옹 길을 넘는 게 프랑스 길에서 가장 높은 걸로 아시는 분도 있지만, 높이로만 치면 나폴레옹 길은 1400m 이쪽저쪽이며, 여기가 1500m 고지 부근이다. 그런데 체감상 첫날이 훠얼씬 더 힘든 이유는


1. 그땐 몸이 적응이 안 되어 힘들기도 하였을 것이고

2. 프랑스 쪽은 지대가 원체 낮아 생장이 해발 200m쯤에 있으므로, 1400m 고지로 올라오면 단순 계산으로도 1200m나 올라온 셈이다. 그런데 여태 걸어온 부르고스 - 레온  - 아스토르가로 이어지는 땅은 이미 고도가 800-900m 정도의 고원이다. 따라서 1500m까지 600-700m 정도만  오르는 셈이니 체감상 첫날보다 쉬울 수밖에 없다.


의외로 스페인의 평균 해발고도가 유럽 국가 중 2위라는 사실을 알아두자. (1위는 물론 넘사벽 스위스이다.) 오리손이 해발 800m쯤 되니 생장에서 오리손까지 오는 것만도 상당히 힘든 일이다.

구스타보와 지오바나가 놓고간 돌 발견. 오늘 오전에 여길 지나갔을것이다


아무튼 이 십자가 주위로 커다란 돌무덤이 쌓여 있는데 전부 순례자들이 놓고 간 돌이다. 돌뿐 아니라 각종 편지, 사진, 인형, 묵주, 리본, 가리비, 스티커, 신발, 양말 등등 해서 오만가지 물건이 다 있고, 또 어떤 분들은 정성스럽게 철판이나 동판에 뭔가를 새겨와서 붙인다.



레온을 지났을 때 DM으로 부탁을 하나 받았는데, 철 십자가에 붙여놓은 뭔가가 잘 있나 확인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확인해 보니 개신교 성서 구절과 이름을 철판에 새겨서 기둥에 피스로 박아놓으셨고, 여전히 잘 붙어있었다.



나중에 순례길에서 찍은 십자가 사진을 전부 모아봐야겠다. 뭔가 데스 메탈이나 고스 밴드의 앨범 커버 사진으로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



저번 주말부터 계속 고온 경보가 발령 중이다. 예보는 35-40도 정도로 나오고 직사광선 아래선 45-50도도 우습게 넘어간다. 하지만 아무리 날이 더워도 그늘에만 들어가 있으면 살만하다.


때마침 바람이 솔솔 불어, 철 십자가 옆 그늘진 벤치에 누워 세월아 네월아 하는데, 타이완 출신의 비비안이 설설 올라오는 게 보였다. (얘의 타이완 이름은 왕 웨이다. 나중에 알베르게 체크인할 때 듣게 되었다)



어제 아스토르가에서 헤어질 때 몇 마을 더 가고 싶다 하였으니, 최소 무리아스나 엘 간소에서 왔을 텐데 늦어도 너무 늦은 시간이다. 이유를 물어보니 왼쪽 다리가 불편하다 하였다. 살펴보니 종아리 앞쪽 근육에 문제가 있어 보였다. 큰 문제가 아니라 다행이지만 일단 엘라세보까지 내려가야 하기 때문에 스트레칭과 마사지를 간단히 해주고, 자주 쉬면서 내려가기로 하였다.



원래 같이 다니는 홍콩 출신의 샘이 있었는데 샘 어디 갔냐고 물으니 자기가 늦어서 먼저 보냈다고 했다.



구호 기사단원 토마스가 운영했었다는 만하린의 알베르게이다. 지금은 순례객을 받지 않는다. 힘에 부쳐 운영을 접은 상태라 한다. 문은 닫혀있지만 라디오 음악소리가 들려오는 걸로 보아 안엔 누군가 있는듯하였다. 듣기론 여긴 샤워실이나 수세식 화장실이 없는 알베르게라고 했다. 나중에라도 다시 열기는 할까, 이대로 사라져 버리는 것일까.



만하린을 지나면 이제부턴 슬슬 하산길이 시작된다. 산의 서쪽 사면으로 내려가 폰페라다를 내려다보게 되는 것이다.



드디어 산 아래로 저 멀리에 폰페라다가 보였다. 얼마 안 걸릴 성싶어 한걸음에 내달리고 싶었지만, 산길을 꼬불꼬불 내려가는 것과 눈에 보이는 직선거리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실 아스토르가에서 엘라세보까지 37km 정도 되니 이미 오늘 온 거리가 적지 않고, 거기에 높이까지 생각해서 보정하면 거의 40km는 온 셈이다.


라바날 델 까미노부터 엘라세보까지의 산길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얼굴로 달려드는 파리만 빼고)



때론 너덜길이 순례자의 발을 괴롭히지만, 작은 나무와 풀과 꽃이 조화를 이룬 배경으로, 가느다란 오솔길을 헤치고 가는 맛이 꼭 어딘가 한국 산을 오르는 바로 그것이었다.



지금까지 본 바론 첫날 피레녜를 제외하고 스페인의 산들이 크게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압도하는 것도 아니며, 큰 감탄을 자아내지도 아니했다. 대개는 고원과 야산이 끊임없이 이어져 단조롭기까지 한데, 자칫 스페인 특유의 소박한 산촌 마을들이 없었더라면 들꽃 없는 빈 들과 같이 밋밋하였으리라.


하지만 이 구간엔 머물다 가고 싶은 마을들이 많이 있고, 산과 마을과 주민과 순례자가 어우러져 친근함과 평화로움을 만들어내었다.



강행군 끝에 엘 아세보에 도착했다.



엘라세보엔 수영장이 있는 큰 알베르게가 인기이다. 가격도 12유로라 하니 전혀 나쁜 편이 아니다. 허영 덩어리 페데리카는 물론이고, 이탈리아 키즈는 다 거기로 갔다고 했다.



비비안은 기부제 알베로 간다고 하여서 체크인하는 데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녀가 체크인하는 걸 보며 잠시 기다리는 동안 나는 어디로 갈 것인지 다른 오스피탈레로가 물어왔다. 수영장 있는 쪽으로 간다 하니 들릴락 말락 한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젊은이들이 그렇지 뭐 하는 표정이었다.


자기들은 종교단체나 사회단체로부터 지원을 받지 않고, 오직 순례자들의 기부금으로만 운영하기 때문에, 공과금이나 식품은 근근이 충당되지만 시설 정비나 확충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했다. 그 순간 마음을 돌려 여기에 묵기로 했다. 수영장은 페데가 인스타그램 사진에 올려주겠지.

베드버그가 타고 오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요즘 철엔 여기서 묵는 순례객이 많지 않다고 했다. 명부를 보니 어제는 달랑 4명이었다. 수영장 딸린 알베르게에서 이 마을 순례자들을 거의 흡수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희한하게도 곧 스물 세 자리의 침대가 전부 차버렸다. 흐뭇한 표정으로 만실 표시를 내거는 나이 지긋한 오스피탈레로의 손길이 어딘가 신이 났다.



커뮤니티 디너 시간이 찾아왔고 오스피탈레로는 먼저 사과의 말을 했다. 요즘 철엔 여길 찾는 이들이 많지 않아 음식과 술을 많이 준비해 놓지 않았으니 양이 부족해도 이해해 달란 말이었다. 그리고 각자의 잔엔 물을 먼저 가득 따라놓았는데, 그걸 먼저 다 마시고 나서 그 잔에 샹그리아를 마시라고 했다. 오늘 술을 많이 준비하지 못한 오스피탈레로의 트릭이라고 하길래 다들 웃었다.


각 나라의 말로 서로 축복하는 시간을 가지고 소박한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셀러리와 사과가 들어간 샐러드는 맛이 있었고 겨우 반쪽씩 돌아간 빵에도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친구는 시카고에서 온 브라이언이다. 멕시코계 아버지와 과테말라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일몰을 본 후 바르에서 같은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했는데, 그 멋진 콧수염은 멕시칸계만 가질 수 있는 특권이냐고 물었더니 한참 웃더니 나에게 맥주를 샀다.


 

폰세바돈에선 일출을 봐야 한다면, 엘라세보에선 일몰을 봐야 한다. 구경하노라니 해는 짧은 노을만 보여주고 정말 눈 깜짝할 새 금방 떨어져 버렸다. 해가 이렇게 빨리 움직이는 거였나 새삼 알게 되었다.



이렇게 오늘의 해도 사라졌다.


여기 알베르게의 시설은 편리함이나 깨끗함과는 사뭇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찾아온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우리에겐 배려가 있었고, 연대가 있었으며, 고락을 함께하는 동지애(camaraderie)가 있었다.


점차 현대화, 산업화, 자본화, 상업화되어 가는 까미노 위에서도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한번 더 생각하자.


영세한 여기 알베르게들이 그 물결에 휩쓸려 사라지지 않고, 부디 오래오래 살아남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일몰을 보곤 오스피탈레로가 알베르게 문을 잠그고 순례자들을 전부 바르로 몰고 나갔다. 오늘 브라이언이 맥주를 샀으니 다음엔 나도 사야 할 텐데 그는 내일 폰페라다에서 그친다 했다.

06:10 ~ 17:00

아스토르가 - 엘라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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