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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번만 더 May 06. 2024

26. 꺼내기 쉽지 않은 말

21일 차(1), 아스토르가 - 엘 아세보 데 산 미겔 37km

8월 22일 화요일


새벽 서너 시까지 아스토르가 전체에 울리는 음악은 그칠 줄 몰랐다. 스페인의 피에스타 사랑은 정말 남다른 구석이 있다. 시끄럽기도 하고 방이 덥기도 해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실리콘 귀마개라고 성능이 별반 다른 것도 없었다.


이렇게 잠 못 자고 피곤하면 하루 쉴까 하는 유혹에 시달린다. 그래도 일단 옷을 주워 입고 가방을 챙겼다.


길을 나서는 게 어렵지, 일단 나서면 열심히 잘 걷는다. 너무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6시 10분쯤 알베르게를 나섰다.



에스떼야에서도 한번 봤지만 축제가 끝난 다음날은 청소하는 분들이 고생이다. 깨진 잔과 병이 굴러다니고 서로에게 쏟아부은 술 때문에 거리가 온통 끈적끈적하다. 하지만 청소부들은 이제는 이골이 난 모양으로 척척 거침없이 청소를 해나갔다. 마무리로 물청소차가 와서 바닥을 씻어냈다. 이른 새벽부터 시작해 사람들이 출근하기 전까지 해치워야 할 테니 여간 손놀림이 바쁜 게 아니었다.


마시모는 어디에나 있다

부지런히 걸어서 무리아스에 도착했다. 마을을 나서서 30분쯤 걸으니 십자가 옆에서 왁스 세요를 찍어주는 남자가 있었다. 오늘 무리아스에서 출발했다는 마시모가 이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마테오라며 소개를 해주었다.



항상 기부제의 뭔가를 볼 땐 얼마를 지불해야 하는지, 이게 얼마의 가치를 가질까 생각하게 된다. 개개인이 느끼는 효용이란 전부 다를 것이므로, 거기에 얼마를 내야 받는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지 않을까, 또 나의 체면이 깎이지 않을까 체면 비용도 고려해야 하니 여간 복잡한 게 아니다.



모양도 여러 가지 있고 제법 볼만하다.



엘 간소에 도달했다. 저기 멀리 삼각형으로 보이는 곳이 어젯밤 페데리카가 묵었을 인디언 천막 알베르게인가 보다. 이거 때문에 어제 여기까지 와서 묵는 사람이 꽤 되었다. 숙박도 10유로라니 나쁘지 않고, 특이한 숙박 경험을 원하면 아스토르가를 패스하고 올 법도 했다. 어제도 인디언이라는 단어에서 살짝 불편하긴 했는데 정복자의 후손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인디아에 사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은 분명 아닐 것이었다.



중간중간 십자가나 돌무덤이 많고 거기에 여러 가지 기도나 소원을 적어놓은 사람들이 많다.



그중 ‘어머니 사랑합니다’라고 적어놓은 돌이 눈에 띄었다. 이 얼마나 절절한 사랑 고백이란 말인가. 잠시 눈물이 핑 돌았다.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하여도 실지로 꺼내기는 쉽지 않은 말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말들이 돌들에 적혀있다. 다음번 준비물엔 유성 마커를 꼭 넣으리라 생각했다.



엘 간소를 떠나기 전, 간식을 사기 위해 들른 가게에서 개 두 마리와 고양이 두 마리를 만났다. 빵과 하몽의 냄새를 맡았는지 이렇게 살갑게 군다.


마시모가 벤치에 앉아 쉬는 나를 지나쳐갔다.




라바넬 델 까미노까지 왔다면 이제 프랑스 길에서 가장 높은 고지에 오를 차례이다.


여기는 산을 넘을 마음의 준비가 좀 더 필요한 순례자들이 베이스캠프로 삼는 곳이다. 작은 마을치곤 상점과 알베르게가 꽤 많이 있다.


첫 번째 만난 상점의 물가는 좀 센편인데, 여주인장이 파워에이드 한 병에 3유로, 콜라 한 캔에 2유로를 불러왔다. 귀여운 개와 고양이가 있으므로 사파리 관람료다 생각하고 기꺼이 지불했다. 11시를 약간 넘어 드디어 마음의 준비가 끝났다.  




본격적으로 고개에 오르면 제법 급한 경사와 거친 돌길이 순례자를 맞이한다. 숨이 점점 가빠왔지만 발을 바삐 놀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숨이 차 죽을 것 같은 순간에 살아 있다는 느낌이 강해졌다. 마시모를 다시 따라잡았다. 오르막에서 더욱 빨리 걷는 나를 마시모는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지쳐 얼굴이 새빨개진 그를 뒤로하고 산을 올랐다.



한 시간 반이 조금 안되어 폰세바돈에 도착했다. 고지의 동쪽 사면 높이 위치한 예쁜 마을이다.



이제는 무너진 옛 돌집들 사이에 아기자기한 새 마을이 들어서 있다.



거리를 가득 채운 제비 떼의 노랫소리가 경쾌하였다. 여긴 아스토르가 쪽을 내려다보는 탁 트인 전망 덕에 인기가 많은 숙박지이다. 하나 있는 기부제 알베르게에 머무르기 위해 부지런히 걸어 올라오는 청년들이 많았다. 아담과 쥴리는 여기서 묵겠다며 걸음을 멈추었다. 동쪽을 바라보는 마을이라, 여기서 일출을 맞이하고 철 십자가까지 걷는 오전 시간이 참 좋다는 평이다. 여기를 지나면 폰페라다를 내려다보는 하산길이 시작될 것이었다.



나는 오늘 엘 라세보 El Acebo까지 갈 생각이라 상점에 앉아 잠시 쉬며 이온음료를 마셨다. 뒤이어 도착한 마시모도 연신 담배를 태우며 마지막 고지를 넘을 태세를 가다듬었다.


아 참, 마시모는 일전 빰쁠로나 공립 알베 앞에서 젠체했던 그 이탈리아 아저씨다. 그땐 참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그 역시 쉬는 날 하나 없이 지금까지 쭉 함께 걷고 있다. 여기선 좋으나 싫으나 함께 걷는 이유만으로 정이 든다. 지금은 하루라도 안 보이면 이상할 지경이다.



글이 길어지네요. 8월 23일 오전 10:35, 엘 라세보에서 폰페라다로 향하는 길목, 고풍스러운 마을 몰리나세카의 한 츄로스 카페에 앉아, 어제를 생각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좋은 곳에 있으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글이 술술 써져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너무 아쉽습니다. 왜 헤밍웨이가 빰쁠로나의 까페 이루냐 에서 글을 썼는지, 조앤 롤링이 스코틀랜드의 까페 엘레펀트와 포르투의 머제스틱 까페에서 글을 썼는지 알 법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도 갈 길이 멀어, 여기서 글을 한번 끊고 이만 길을 떠나야 할듯합니다.


항상 염려와 격려를 보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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