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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번만 더 May 03. 2024

25. 스페인의 무시무시한 피에스타

20일 차,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 - 아스토르가 16.5km

8월 21일 월요일



 Verde Hostel의 새벽, 아침식사 시간이다.


탄수화물 식단이 골고루 갖춰져 있었다. 육식은 아니니 비건 식단이라 할 수 있긴 한데 건강에 도움이 될까는 의문이다. 하지만 역시 아침 빵은 버터와 잼을 듬뿍 발라먹어야 제맛이다. 원래 몸에 해로운 게 맛있는 법.



새로 난 도로 곁 오래된 국도가 여전히 까미노로 쓰이고 있었다.



이제는 차가 다니지 않는 길가에 밤이 영글어 갔다.

어느새 8월 말, 가을이 지척이었다.



9시경 십자가가 서있는 산 후스토 델라 베가의 언덕에 올라섰다. 베가 너머로 보이는 시가지가 아스토르가이다. 이제 불과 5-6km 앞으로 다가왔다.


알리시아 그리고 페데리카와


이제 알리시아는 어머니가 계시는 아스토르가에서 까미노를 멈출 예정이다. 부르고스에서 일단 집에 갔다가 레온-아스토르가 구간을 우리와 함께 걷기 위해 다시 돌아온 그녀이다. 역시 집이 가까우면 이렇게 편리하다. 개도 데리고 와서 걷는 동안 어머님 댁에 맡겨 놓았다고 한다.



언덕을 내려가 만난 첫 번째 바르에서 커피와 또르띠야를 시켰다. 나에겐 또르띠야 없는 스페인 아침식사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역시 아침엔 계란이다. 기름을 너무 듬뿍 둘러 부쳐내는 것만 빼면, 푸짐하니 정말 마음에 든다.



바르 앞에 있는 약국에서 실리콘 이어 플러그를 샀다. 이것 없는 밤은 정말 길고도 길다. 이 제품은 처음 써보는데 효과가 있으면 좋겠다.



아스토르가에 가까이 왔다. 다리 너머로 멀리 성당의 종탑이 보였다. 성당 바로 앞에 멋진 주교 궁전이 있다 했다.



오전 중에 아스토르가에 들어왔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여기도 축제가 한창이었다. 스페인의 여름은 축제의 계절이다. 슈퍼마켓은 전부 문을 닫았다.



도시를 둘러보니 오래된 성벽과 도로가 보였다. 일전에 나헤라에서 만난 오선생님이 ‘로마인 이야기’라는 책 이야기를 해주신 덕에, 레온부터 로마 유적을 쭉 눈여겨보고 있다. 오래전 학창 시절에 읽었기 때문에 이젠 읽었다는 기억만 나고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희미하다. 한때 ‘바다의 도시 이야기’나 ‘십자군 이야기‘ 같은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재미지게 읽었었다.



로마시대의 성벽이다. 둥글게 돌출된 부분이 레온에서 본 것과 매우 흡사하다. 보존 상태로 보아 중세에 재보수하여 쌓았을 것으로 보인다.



다 함께 성벽 옆 공원에서 산책을 하고, 광장 카페에 모여 앉아 시원한 것을 마셨다. 서로 크레덴셜을 펴보며 세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알리시아의 두 번째 찍힌 세요가 내 것과 똑같았다. 그 말인즉 생장에서 같은 숙소에서 묵었다는 것인데, 여태 같은 숙소에서 시작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알리시아 - 파스쿠알레 부부와 처음 인사를 튼 곳은 팜플로나 공립 알베르게의 세탁실이었다. 까미노는 이렇게 좁은 곳이다.



페데리카는 오늘 몇 마을 더 가겠다고 했다. 인디언 텐트 같은 숙소에서 꼭 묵어야겠다며 엘 간소의 그 알베르게에 기필코 가야겠다고 했다. 개인의 취향이니 할 수 없다. 나는 오늘 17km밖에 걷지 않았지만 반차처럼 여기서 머물기로 했다. 반차는 덜 마른 빨래와 못다 쓴 글을 마무리하는데 쓸 예정이었다.


루카스는 이미 기진맥진이다
하와이에서 왔다는 케빈

Siervas de María 알베르게이다. 숙박비 7유로. 바로 뒤에 도착한 줄리, 아담과 즉석에서 조를 짜고 방을 배정받았다. 주방도 있고 휴식공간과 식당이 참 넓은데 오늘은 축제일이라 식재료 살 곳이 없는 게 흠이었다. 여기 아스토르가도 연박으로 쉬었다 가기 좋은 곳이다. 놀랍게도 리셉션 옆엔 찬물이 나오는 음수대가 있었다!



바로 옆으로 성벽이 보인다.



내려다보는 뷰가 좋다.



빨래를 널어놓고 글을 쓰다 깜박 한 시간가량 잠이 들었다. 퍼뜩 깨니 5시 반 정도가 되었다. 바삭한 빨래를 걷고 나서 함께 시내 구경을 나가기로 했다.



먼저 가까운 바르에서 순례자들과 맥주를 한잔했다.


시에스타 시간이 끝나 축제를 즐기는 인파가 거리를 가득 메웠고, 음악을 연주하는 밴드가 여럿 거리를 돌아다녔다.



스페인 사람들의 파티력은 정말 무시무시하다. 술을 페트병으로 들고 다니며 마시는 건 여기선 평범한 축에 속한다. 물총에 술을 채워 들고 다니며 난사하고, 10리터 20리터 말통에다 틴토 데 베라노를 가득 제조하여 마시는가 하면, 쇼핑카트에도 술을 가득 실어 밀고 다니며 마시고 논다. 축제를 즐기는 모두가 하얀 티셔츠를 입고 다니며 롤링 페이퍼 마냥 아무의 옷에나 낙서와 서명을 남긴다. 누구나 여기 오면 축제력 +99가 된다. 밴드 앞에서 춤 한번 추고 박수를 받으며 성당으로 향했다.


20대엔 파티 찐따였는데 30대에 호주에서 배운 파티력을 40대에 스페인에서 쓰고 있다. 여기 사람들은 아무도 내가 찐따 아싸였는지 모른다. 내가 지금 보여주는 모습을 그들은 전부인 양 알게 된다. 적어도 여기선 친절한 사람으로, 배려 있는 사람으로, 잘 노는 사람으로 그들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다.


5리터 통은 기본이다


공포의 틴토 데 베라노 카트. 마시고 죽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인다. 저기 한번 타면 살아남을 수 없다.



쥴리 조이섬 쥴리엣


성당을 다녀와 다시 경건해진 마음으로 광장 까페에 둘러앉아 일행과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갔다.


무슨 할 이야기들이 그리 많은지 제임스 웹 망원경에서부터 어제 코 고는 아저씨가 트랙터 소리를 냈다느니, 베드 버그에 물린 이야기까지 시간은 항상 모자라다.


네덜란드에서부터 걸어온 전직 신부 프랭크는 나를 붙잡고 스피리추얼 한 삶에 대해서 일장 강론을 하였다. 아무래도 종교가 없다는 내가 매우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통금시간이 다 되어 겨우 자리를 파하고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얼근하게 취한 프랭크는 나를 마지막 순간까지 몇 번이나 껴안고 축복을 내렸다. 마지막에 틴토 데 베라노를 대접하는 게 아니었나 보다.


이제 순례 일정도 후반부로 치달아가고, 순례자들의 마음엔 아쉬움이 가득한 모양이다. 쥴리엣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아마 내년 방학에 여기서부터 다시 순례를 이어갈 것이다.



밤늦게까지 피에스타의 열기가 식을 줄 모르는 여기는 스페인의 아스토르가이다.


6:30 ~ 10:55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 ~ 아스토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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