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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번만 더 May 12. 2024

30. 예정되었던 이별

24일 차, 오 세브레이로 - 트리아카스텔라 20.6km

8월 25일 금요일



오 세브레이로에 안개가 잔뜩 끼었다. 현재 온도는 14도, 쌀쌀했다. 어제 40도를 기록한 걸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머뭇대다 7시 반에 떠밀리듯 길을 나섰다. 안갯속에 아직도 모든 것이 희미했다.



안개가 어느새 안개비로 변해 내렸다. 후드를 뒤집어썼다. 몸도 잘 안 풀리고, 걸어도 체온이 전혀 오르지 않았다. 중간에 잠시 날이 개나 싶더니 또다시 흐려지고 비가 굵어졌다. 뻣뻣한 움직임으로 계속 가파른 오르막을 올랐다. 오 세브레이로가 이 산의 정상인 줄 알았더니 아직도 오르막이 꽤 남아 있었다. 아주 급한 경사가 이미 마음을 놓은 순례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행운, 행복, 그리고 평온


힘들게  Padornelo에 막 들어섰을 때, 길옆에 클로버 한 뭉치가 있었다. 지나가며 얼핏 들여다보니 한눈에 네 잎 클로버가 보였다. 뒤따라오는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고 자리를 떠났다.


어렸을 적엔 보이는 대로 따다가 코팅하거나 책갈피에 끼우고 했었지만, 이젠 그러지 않는다. 내가 따버리면 다른 이들은 볼 수 없게 되기도 하거니와, 행운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까닭이다.



힘을 짜내 Alto do Poio의 고지를 넘어 드디어 본격적인 하산길이 시작되었다.


성수기가 아니라 그런지 문을 연 바르가 별로 없었다. 급 오르막이 끝나는데 하나가 있고 그 이후로 쭉 없다가 Fillobal 거의 다 와서 다시 하나가 있다. 가급적 오르막이 끝나고 바로 있는 카페에서 쉬기를 권한다.



갈리시아의 마을들은 목축을 주로 한다. 마을 전체에 소똥이 깔려 있고 냄새가 심해 쉴 곳이 마땅치 않다. 음식을 사거나 물을 받거나 할 데도 없다. 마을 할머니가 식어빠진 끄레뻬에 설탕을 뿌려 팔고 계신 게 전부였다.

몸이 계속 차갑고 뻣뻣한 데다 갑자기 왼쪽 발바닥이 심하게 아파 걷기가 어려워졌다. 속도가 확 떨어져 엉금엉금 기다시피 가게 되었다. 어디 앉아 쉴 데가 있으면 좋겠는데 바르는커녕 벤치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산티아고가 목전인데 거의 다 와서 웬일이람.’ 느리게 내려오다 드디어 나타난 까페가 반가웠다. 한참 동안 발을 주물렀다. ‘며칠은 몸이 더 버텨줘야 할 텐데.’



‘오늘부턴 조금 덜 걸을 테다.’ ‘말년 병장은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한다는데’, ’공든 탑이 설마 무너지랴.‘ 속으로 혼잣말을 열심히 하며 발을 주물렀다. 내리막은 오르막보다 더 조심해야 한다. 여기서 족저근막염이 재발하면 끝장이다.



뜨거운 걸 마시고, 한참 발을 주무른 끝에 이번에는 보다 수월하게 내려올 수 있었다.



트리아카스텔라에 다 와선 정말 오래된 밤나무가 서있었다. 800살 된 나무라는데 몇 명이서 팔을 벌려야 겨우 안을 수 있다.


너와와 돌판으로 지붕을 얹은 산촌의 집들, 이젠 버려져 풀이 무성하고 구멍이 곳곳에 뚫려있다.



내려오는 길은 분명 아름다웠을 테지만 안개가 끼어 제대로 경치를 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안개 낀 산은 그 나름의 운치가 있다.


트리아카스텔라에 들어오자마자 공립 알베르게가 있다. 그리고 거기엔 바르가 하나 있어 길을 더 가는 사람과 오늘 여기서 머무를 사람이 헤어지는 장소가 된다.  

나는 이제 살살 걸어서 무리 없이 골인할 것이므로, 오늘 사모스까지 간다는 이탈리아 키즈들과는 마지막일듯 싶었다. 이들은 귀국 일정이 촉박해서 계속 강행군 중이었다. 하지만 까미노에서 장담은 금물이다. 이제 못 만날 거 같다 싶다가도 언제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른다.



그러므로 이게 이레네의 마지막 웃는 얼굴일 테다.


그녀는 어제 내가 늦게나마 오세브레이로까지 올라올 걸 예상하지 못했는지, 만나자마자 정말 정말 꼭 껴안아주었다. 오늘은 손을 있는 힘껏 세게 쳐주고 사라졌다.


여기선 헤어질 때 굿바이라고 하지 않는다. 항상 길 위에서 보자 하며 헤어진다.


이레네가 가고도 한참이나 주저앉아 페데리카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는 힘들다며 오 세브레이로에서 묵겠다고 DM을 보내왔다. 얘도 슬슬 체력이 고갈되어가나 보다.

결국 골인은 새 얼굴들과 하게 되는 것일까? 같이 출발했던 커다랗던 그룹은 잘게 쪼개져, 오늘 트리아카스텔라엔 나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내 곁엔 어제 새로이 만난 이들이 있었다.



트리아카스텔라의 공립 알베르게.


로베르토


슈퍼마켓에서 피자라고 쓰인 원형의 미확인 물체를 사다 적당히 점심 겸 저녁을 때웠다.


여긴 화장실에 잠금장치가 없다. 대신 스윙 도어, 그 서부 영화에서 나오는 선술집 문이 달려 있다.



각 방의 문도 이것이다.


알베르게의 마당은 정말 정말 넓다. 축구공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할 정도로 넓었다.


테레사와 까예따나 모녀가 같은 방으로 들어왔다.



7:30 ~ 13:10

오 세브레이로 ~ 트리아카스텔라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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