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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번만 더 May 18. 2024

46. 역시나 좁은 세상

38일 차, 포르투, 이어지는 순례의 인연

[포르투 여행 3편]


9월 7일 오후


비비와 헤어지고 어딜 갈까 생각하며 잠시 주변을 서성였다. 그런데 문득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180이 넘는 장신에 길쭉한 팔다리, 꾸밈없이 수수한 옷차림, 집게핀으로 질끈 올린 머리. 독일 출신의 하나가 틀림없었다.


온타나스에서 처음 만난 후, 길 여기저기서 자주 마주친 사이다. 포르토마린 공립 알베르게에서 같은 방에 묵고 다음 날 한 구간 정도 같이 걸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 큰 공통 화제를 찾지 못해서 이야기가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긴 다리를 이용해 주로 앞서가는 편이어서 거의 뒷모습만 보곤 했었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마주친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 하나도 무척이나 반가워하고 신기해하였다. ‘세상 참 좁다’ 빅 허그를 마치고 우리가 거의 동시에 내뱉은 말이다.


여기서 뭐 하냐고 물었더니 신발과 선글라스를 사러 다니는 중이라 한다. 아마도 순례를 마치자마자 트래킹화는 버린 모양이다. 신발이 지금 신고 있는 플립플롭 밖에 없다고 한다. 버켄스탁을 찾아다니는데 원하는 모델이 없다고 투덜댔다.


몇 군데 신발가게를 같이 돌았지만 버켄스탁 매장도 없을뿐더러, 어쩌다 취급하는 가게도 가짓수가 매우 적다. 그건 독일가서나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선글라스를 먼저 사라고 했더니 그녀는 바로 수긍했다.


몇 군데 싸구려 가게에서 이것저것 써보더니 초록색 렌즈의 13유로짜리 하나를 골라집었다. 목소리에 최대한 영혼을 담아서, 잘 어울린다고 해주었다.


그리곤 곧바로 충동구매를 후회하는 모양이었다. 초록색이 너무 어둡다며 계속 다른 가게에서도 선글라스만 만지작거린다. "내 거 써볼래?” 하고 건네주니 바로 착 가져다 쓴다. “이거 장미색 같네, 자외선 차단도 안될 거 같은데 왜 쓰고 다니는 거야?” 하길래 이걸 쓰고 다니면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착용하면 자신감이 올라간다고.


햇빛 차단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레온의 새벽 거리에서 어느 술 취한 녀석이 떨어뜨리고 간 것을 주워, 여태 잘 쓰고 있다.



볼량 시장에 들렀다. 과일, 야채, 소시지, 치즈, 와인 등 먹거리와 각종 기념품, 특산품도 있다. 굴같이 바로 먹는 해산물도 인기가 좋은 품목이다. 특산품으로 염장해서 말린 대구인 바깔랴우가 걸려있었다.



하나는 시장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여 두세 바퀴를 금방 돌았지만 생선 가게를 지날 때마다 “젖은 개 냄새나는 것 같지 않아?”라며 물어왔다. 이는 나가자는 뜻으로 들려, 무엇도 사지 않고 얼른 바깥으로 나왔다.


시청 앞에 파란 포르토 사인으로 가서 사진 찍자 하니 좋다고 한다.



하나는 글쓰기를 좋아하고, 어렸을 땐 해리 포터도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렐루 서점이나 머제스틱 까페 갈까 물었더니 오전에 그 서점을 다녀왔다고 한다. 온라인으로 예약하고 갔는데도 사람이 너무 많았다고.



그리하여 머제스틱 까페로 가서 뭔가 마시기로 했다. 한데 여기도 사람이 너무 많아 빈자리가 없다. 줄 서는 건 둘 다 별로라 파브리카 다 나따로 가기로 했다.



산투 일드폰수 성당


성당과 기념품 가게를 구경하며 천천히 거리를 돌아다녔다.


포르투는 기념품들이 참 예쁘다. 또 다른 특산품인 코르크가 따뜻하고 폭신한 느낌을 주었고, 시원하고 단단한 느낌을 주는 아줄레주와 어울려 냉온의 조화를 만들어냈다.




오늘의 두 번째 나따 타임이다. 까페 본본과 나따를 시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아까도 먹었다고 하니 자기는 다른 데 가도 되는데 왜 또 왔냐고 그런다. “아까는 다른 지점이었어” 하니 “이거 분점도 있어? 몰랐네” 이런다.



자연히 우리의 화제는 까미노로 옮겨갔다.


느낀 바가 많았노라고 하기에, 그 감정이 희미해지기 전에 뭔가 기록을 하거나 사진첩을 만드는 게 어떨까 말을 꺼내보았다.


그녀는 아까도 말했듯이 글쓰기를 좋아하니, 경험에 대해 뭔가 글을 남기고 싶다 했다.


그럼 여기서 한 장씩 쓸까 했더니 자기는 시끄러운 곳에서 글을 못쓴다고 한다. 그럼 내가 먼저 쓴다 하고 냅킨을 한 장 가져와, 순례길에서 보아온 그녀의 모습, 그리고 오늘의 재회에 대해 글을 썼다.



예전에도 언급했듯, 아침에 한참 걷고 나서 까페에 앉아 글을 쓰면 집중이 잘 된다는 걸 순례길에서 발견한 바 있다.


주위의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 상태에 이젠 쉽게 들어간다. 어린 시절 책을 읽을 때 느낀, 아주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기분이다.


별 볼일 없는 내용이나마 쓱쓱 써 내려가는 게 신기한 모양이다. 이윽고 쓰기를 마치자 자기도 써보겠다 한다.


내 펜을 빌려주었다. 이 펜으로 쓰면 더 잘된다고 약을 팔았다. 그녀가 글을 쓰는 동안 나도 한장을 더 썼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그녀가 쓰기를 마쳤다. 이번엔 주변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자기에게 그런 집중력이 있는지 몰랐다며 아주 좋아했다.



서로 쓴 글을 바꿔 가졌다. 내가 책을 쓰면 꼭 알려달라고 한다. 이러다 진짜 책을 쓰게 생겼다.


바깥에선 ‘걸 프롬 이파네마’가 들려왔다


창밖에선 버스킹 하는 이들의 ‘더 걸 프롬 이파네마’가 들려왔다.


https://youtu.be/v5DZ5clg-bg?si=hfs7OtbWgKQihmCn



옆사람에게 부탁하여 사진을 찍고, 나와서 걷다 아름다운 알마스 성당 앞에서 헤어졌다.




포르투는 만나기도 헤어지기에도 눈물 짓기에도 좋은 장소이다.


천천히 숙소로 돌아왔다. 휴식하다 해가 질 때쯤 나가 모루 공원에서 노을을 볼 참이다.



해 질 녘의 돔 루이스 다리와 모루 정원은 미어터진다고 해도 빈말이 아니었다. 포르투의 절반은 여기 나와 있는 듯하였다.



트램 기관사들은 연신 비키라며 다리 위의 보행자들에게 벨을 울려댔다. 전차와 보행자가 같이 사용하는 루이스 다리는 복잡하기 짝이 없다. 사진을 찍는 이들과 걷는 이들이 한데 섞여 붐빈다. 정원도 사정은 매한가지다.



포르투의 석양 보셨습니까?



점차 어둠이 내리며 도시엔 하나 둘 불이 켜진다.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시간이다.



돌아오는 길에 까페 산티아고를 만났다. 이름만으로도 뭔가 솔깃하지만 여기도 들어가기엔 줄이 길다.


숙소로 돌아와 어제 인사를 나눈 마틴 - 이블린 커플과 와인을 마셨다. 포르투갈 와인도 괜찮다느니, 북한이 어쨌느니 하는 시답잖은 이야기가 오고 가고, 그렇게 포르투의 마지막 밤은 끝이 났다.


이제 내일 아침 버스를 타고 파리로 돌아간다. 마음속이 허했다. 영혼의 일부를 어딘가에 빠뜨린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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