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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번만 더 May 16. 2024

38. 산티아고의 밤

계속 31일 차,

[무시아 - 피스테라 길 1편]


9월 1일 산티아고 입성일 저녁


저녁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다 9시가 넘어서야 그쳤다.


운이 좋게도 오늘 대성당엔 향로 봉헌 미사가 있다 하였지만 가진 않았다. 비가 많이 오기도 하거니와, 긴장이 풀려서 그랬는지 저녁 내내 누워서 눈만 끔벅끔벅, 천장을 바라보며 보냈다. 비가 가늘어지고 나서야 아직 도시에 남아 있는 페데리카, 막스, 마테오와 안젤라를 보러 겨우 올드타운으로 향했다.



오 가또 네그로 O gato negro, 검은 고양이란 집에서 저녁을 먹는 중이라고 했다. 해산물을 주로 하는 식당인데 페데가 앉아있는 걸 봐선 여기가 마을 최고 맛집 중 하나일 것이었다.



열 시 넘어 가보니 식사는 거의 파한 분위기고 빈 와인 병도 두 개나 되었다. 거북손 요리가 유명하다는데 나는 요 며칠 뿔뽀를 많이 먹어서 해산물이 그리 당기진 않았다. 6시쯤 했던 이른 요기덕에 출출하지도 않아 다른 곳으로 옮겨 몇 잔 하기로 했다.



산티아고의 밤거리는 순례객들과 현지인으로 뒤섞여 뜨거운 분위기다. 이젠 아침 일찍부터 걸어야 할 걱정 없이 찐하게 마셔보려는 전직 순례자들과, 또다시 피스테라나 무시아를 향해 걷지만 오늘 일단 마시려는 이들이 합세해 바 크롤링을 시작했다.



타파스 바 몇 군데를 거쳐 이 동네서 제일 물이 좋다는 펍 모모를 찾아갔다.


순례를 마친이들은 연신 보드카 샷을 들이켜고, 맥주를 얌전히 마시는 쪽은 대개 내일 다시 걸음을 이어나갈 이들이다. 마테오와 안젤라는 후자이기 때문에 자러 간다며 먼저 자리를 떴고, 나는 내일 떠날지 쉴지 결정도 안 했지만 아무튼 첫 잔으로 시킨 맥주를 최대한 천천히,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졌다.



금방 자정이 다 되었고 페데는 피곤한지 연신 하품을 했다. 순례는 끝났어도 생체시계는 아직 순례 모드인 것이다.


펍을 나와 그녀를 숙소까지 바래다주는 길에 패스트푸드점들을 발견했다. 평소에도 그리 즐기지 않고, 순례 기간 동안에도 패스트푸드를 일절 먹지 않았지만, 술 한잔하고 돌아가는 길에 햄버거 하나 먹는 건 거의 국룰이 아니던가. 홍대역 롯데리아가 괜히 잘되는 게 아니다.


페데와 나는 순식간에 눈빛을 교환하고 무언의 합의에 도달해 안으로 들어갔다.


가비


오늘 처음 일한다는 키 작은 가비는 실수투성이라, 금세 계산대 앞에 줄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걸려 와퍼 세트를 시키고 자리에 와 확인해 보니, 영수증에 난데없이 아이스크림과 쉐이크가 찍혀있었다. 다행히 페데의 치킨 너겟과 양파링 튀김은 이상 없이 나왔지만 나의 햄버거는 매니저가 와서 주문을 수정해 줄 때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하지만 실수 연발이어도 멋쩍은 웃음을 잃지 않는 가비다. 누구에게나 첫날은 있는 법이다.



페데리카와 오래 붙어 다녔지만, 사실 보낸 시간에 비해서 많은 이야기를 한건 아니다. 강행군에서 길과 걸음에 집중할 땐 대화가 끊어지게 마련이고, 하루의 걸음이 끝나고 샤워, 빨래, 식사 등 순례자의 일과를 마치면 잘 시간이 금방 다가온다. 또 다른 동료들도 있고, 우리 그룹엔 이탈리안이 많으므로 이탈리아어로 그들끼리 대화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가 실질적으로 대화에 참여하는 시간은 적어졌다.

그런데 페데는 오늘 의무적으로 잠을 잘 필요도 없고, 술도 한잔 들어갔겠다, 다른 동료도 없고, 겸사겸사 이런저런 대화를 풀어냈다.

나와 처음 걷던 날을 기억한다며 로스 아르코스에서 로그로뇨로 가는 날 이야기를 꺼냈다. (프랑스 길 10편 이야기) 그날은 파스칼과 페데가 몸이 안 좋아 맨 뒤로 쳐진 날이었다. 거의 매일 선두에서 걷던 내가 이런저런 일로 출발이 늦어, 어쩌다 보니 그 둘과 함께 거의 하루 종일 걸었다. 역시 그날도 달리 크게 해 준 건 없었다. 그냥 같이 걸었을 뿐이다. 그게 그렇게 큰 힘이 되었다고 몇 번이나 공치사를 하지만 나는 정녕 모르는 일이다. 하긴 둘 다 로그로뇨에 도착해서 의사를 보러 갈 정도였으니 거기서 그만둘 수도 있긴 했겠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점차 최근의 일로 옮겨왔다. 그리고 왜 갑자기 뒤로 처져 오늘에야 입성했느냔 이야기로 이어졌다. 너에게 그날 했었던 일을 며칠간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하고 있었다고 말해주었다.

페데가 아침 9시 반 대성당 광장에 골인했을 때, 마시모와 루까, 그리고 이탈리안 키드들이 자기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을 보고 눈물이 터져 한 시간을 펑펑 울었다고 말하며, 나도 그 자리에 있었어야 된다고 했다. 난 “그 자리에 없었길 다행이네, 거기 있었으면 나도 펑펑 울었을 것”이라 농을 치며, 원망과 아쉬움을 미안함으로 무마해 보려 무진 애를 썼다.

​​

나는 원래 착하고 친절한 사람이 아니다. 가끔 착한 일을 하고 친절한 척해도, 정작 피곤하고 급해지면 내 앞가림을 먼저 하는 계산적인 (그게 평범한 것인지도)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내 동료들은 내가 여기서 그들에게 한 행동으로 영원히 기억할 것이었다.



나는 여기서 잠시 천사였고 순례자였다. 하지만 그건 돌기둥의 그림자가 순례자처럼 보이는 착시에 불과하다. 나는 원래 돌기둥인 것이다.

페데는 내일 오후 비행기를 탄다 하니, 오전 일찍 광장에서 한 번 더 보기로 하고 들여보냈다. 숙소에 천천히 걸어 돌아오니 새벽 두 시가 다 되었다.

Santiago de Composte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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