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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번만 더 May 17. 2024

40.  가을엔 같이 걸을까요?

33일 차, 네그레이라 - 올베이로아 33.6km

[무시아 - 피스테라 길 3편]


9월 3일


오늘도 33km를 가야 하는데, 나서기 싫은 마음에 자꾸 출발을 미루고 있었다. “800km나 걸었으면 충분하잖아?” 하고 자꾸 내 안의 누군가가 속삭였다. 피스테라 - 무시아 길은 뭔가 사족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버스를 탈까 혹은 하루 더 쉴까 하는 다른 선택지가 아른거린다. 하지만 이제 단 며칠이다. 여기서 버스를 타는 건 다 된 밥에 코 빠뜨리는 격이다. 눈 딱 감고 길을 나섰다.



말이 쉬워 33km이지 사실 건강한 청장년에게도 만만치 않은 거리다. 중간 휴식까지 고려하면 잰걸음으로도 7-8시간 정도는 걸리게 마련이다.


연세가 좀 있으시다거나, 젊어도 평소 운동과 거리가 있다거나, 다리나 무릎이 안 좋으신 분들은 상당한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


이런 분들은 어지간히 큰 공립 알베르게가 아니고서야 선착순 경쟁은 언감생심이다. 경쟁 사회에 지쳐 힐링을 하러 온 이곳에서도 매일같이 치열한 경쟁이 이어진다.



나는 다행히도 아직까지 체력과 근성이 남아있어 특별히 예약 없이 여기까지 잘 왔지만, 저분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이드북이 제시하는 30여 일 코스가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었고, 모두가 그렇게 하는 것인 양 생각해 왔다. 거리를 끊어 다니거나, 사립 숙소를 예약해 다닌다는 분들의 말을 들을 땐, 저분들은 순례가 아니라 편안한 관광을 하러 왔나 하고 짧은 생각을 하던 때도 있었다.



그래도 성수기가 아닌 8월은 숙소가 여유로운 편이었다. 거의 모든 공립 알베르게가, 늦게라도 도착하기만 하면 자리가 남아 있었다.



숲에 들어서면 도토리가 발에 밟혀 와작와작 소리를 낸다. 처음 출발했을 때 엄지손톱만 하던 무화과는, 어느새 수줍어 붉게 물들어가고, 토실한 알밤, 속이 노랗게 꽉 찬 호두가 발 앞에 툭툭 떨어진다.


호두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시는 분들이 많은데, 초록색의 동그란 열매가 달려 있다. 과육을 벗기면 딱딱한 호두 껍데기가 나오고, 그 안에 우리가 먹는 호두 속이 들어 있다.



요게 호두나무다. 지천에 널려 있기 때문에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종종 헤이즐넛 나무도 보인다.


무화과



엽사들의 총소리와 사냥개들이 짖는 소리가 매우 가까이서 들렸다. 총소리가 너무 가까이서 들리면 깜짝깜짝 놀란다.



가끔 가파른 언덕이 나오지만 대체로 아름답고 그늘이 많은 숲길이다. 9월이 되며 눈에 띄게 쌀쌀해졌다지만, 걷다 보면 덥기 때문에 아직은 그늘이 더 좋다.



세시가 되어 올베이로아에 도착했다.



공립 알베르게에 가보니 사람은 없고, 일단 알아서 자리를 맡고 저녁에 등록을 하라는 메시지만 붙어 있었다. 여긴 샤워, 화장실 수가 투숙객 수에 비해 부족하다. 그래도 지붕 아래 몸을 뉘일 침대가 있다는 게 어디인가. 감지덕지 각자 자리들을 잡았다.


사람이 없고 안내문만 붙어 있다




짧은 휴가와 방학을 이용해 사리아 - 산티아고 코스를 걷는 분들이 많지만,  의외로 산티아고 - 피스테라 코스를 걷는 사람이 꽤 된다. 여기도 백여 km 남짓인데, 바다를 볼 수 있고,  피스테라, 무시아에서 각각 순례 증명서가 나오므로 괜찮은 코스이다.


이 마을엔 식료품 상점이 없다. 저녁은 마을에 두세 개 있는 음식점 중 하나를 골라, 순례자 메뉴를 먹을 예정이다. 세 군데를 다 가보고 그중 제일 나아 보이는 하나로 들어왔다.


여기 식당에서 드디어 어머니뻘 되는 한국 아주머니 한 분과 이야기를 텄다. 혼자 식사를 하고 계셨는데, 사실 오 세브레이로 근방에서부터 군데군데 뵙던 분이다.


“올라”하고 인사를 하고 지나가도, 고개만 끄덕하시거나 역시 “올라”하고 그만이셔서 이야기를 크게 걸지 않았다. 혼자 걷는 걸 즐기시거나, 내성적이라 다른 사람과의 이야기를 즐기지 않는 분 등 여러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인사하고 반응이 시원찮으면 대개 그냥 지나치게 마련이다.


내가 지나갈 때 한 번은 한국어로 인사를 하셨었다는데 나는 들은 적이 없다. 사실 여기선 언어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데다 함께하는 한국인 일행이 없다면, 자의 반 타의 반 고독을 즐기는 까미노가 되기 마련이다.


처음엔 외국인들이 인사를 해오고 이야기를 걸어와도, 소통이 안되니 점점 이야기를 피하게 되고, 그룹에서 소외되고 만다. 수십 일간 말도 안 통하는 데서 혼자 다니니 얼마나 힘들고 에피소드가 많으셨겠는가.


그래도 천천히 사고 없이 여기까지 오신 것도 잘 다니시는 거라고 말씀드렸다. 젊은이들도 고독을 못 이기거나, 언어, 건강 등 여러 어려움을 겪으며 다니는 곳이다. 여태 꽤 많은 곳에서 마주친 탓으로 어딘가에서 내가 노래하는 것을 들으셨다고 한다. 이쯤 되면 나중에 길에서 또 뵙게 마련이므로,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인사 하고 친구들에게 돌아왔다.


저녁으로 갈리시안 수프, 돼지고기, 피스테라 케이크를 주문했다. 그리고 주류 대신 스프라이트를 시켰다. 오늘은 꼭 금주를 할 결심이다. 산티아고 케이크는 눅눅한 견과류 알갱이가 씹히는 맛이고, 피스테라 케이크는 뭔가 버터가 덜 들어간 초콜릿케이크의 맛이다. 갈리시안 수프는 육수에다 감자와 시래기 같은 이파리를 푹 삶은 국물이다. 약간 묽은 감자탕 같은 맛이 난다. 이제 갈리시아 지방의 요리도 슬슬 물려간다.



소등 시간이 되어 돌아온 알베르게의 침실에는 우리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줄잡아 수십 마리의 모기가 앵앵대며, 오늘 밤이 결코 수월하지 않을 것임을 경고하는 사이렌을 울려대었다. 아니나 다를까 소등하자마자 공습이 시작되었고 방안의 모두가 각자의 몸을 긁어대기 시작했다. 밤새도록 긁는 소리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암브로조만 빼고 모두 잠을 설친 모양이다. 어떻게 모기가 무는데 잠을 잘 수가 있는지 궁금하다.


8월 메세타를 지나올 땐 모기가 없었다. 원래 날씨가 너무 더울 때는 모기가 번식하지 않는다. 그리고 건조한 지방에는 알을 낳을 물 웅덩이 같은 게 없기도 하다. 하지만 9월의 갈리시아는 습하고 적당하게 기온이 좋아 모기 천국이다.


해가 뜰 때쯤 1회용 침대 시트를 모기장 대용으로 뒤집어쓰고 40분 정도 눈을 붙였다. 진작 이걸 사용했어야 하는 건데 그랬다. 안젤라가 옆을 지나가며, 추워서 뒤집어쓴 줄 알고 걱정을 해왔다.

07:40 ~ 14:50

네그레이라 ~ 올베이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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