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일 차, 올베이로아 - 무시아 31.1km
[무시아 - 피스테라 길 4편]
9월 4일
모기에 물리며 잘 것이냐, 안 물리고 안 잘 것이냐 에서 후자를 선택했다. 그동안은 모기가 별로 없기도 했고, 나 대신 물리는 이들 덕분에 괜찮았으나, 어찌나 모기가 많은지 이번 밤은 예외였다.
아침 즈음 겨우 40분 정도 눈을 붙였다. 5시에 마테오, 안젤라가 나가는 걸 확인하고 깜박 잠이 들었는데 눈을 뜨니 5시 40분이었다. 조금 더 누워 있는데, 6시에 루시아가 신발 끈을 매는 게 보였다. 벌떡 일어나 고양이 세수로 눈곱만 떼고 가방을 메었다.
어느새 달이 반쪽이 되어갔지만 아직은 거기 의지해 길을 갈만하였다. 아주 가끔 랜턴을 켜 바닥을 확인하며 산길을 걸었다. 주변에 큰 물소리가 들리는 걸로 봐선 급류나 계곡이 지나가는 듯했다. 해가 없을 때 움직이면 날이 밝아올 때까지 한두 시간 동안 놓치는 경치가 많다.
오랜만에 보이는 불빛이 반갑다. 바르가 있는 작은 마을을 지났다.
슬슬 동이 터온다.
무시아 - 피스테라 갈림길 직전 바르에는, 쎄 Cee까지 가기 전 마지막 바르라고 잔뜩 겁을 주는 간판이 걸려있었다. 나는 무시아 쪽으로 가지만, 때마침 배가 고프고 물이 떨어져 여기 들어가 앉았다. 올베이로아 엔 식품을 보급받을 곳이 없어 배낭이 텅텅 비어있다.
늘 먹는 대로 까뻬 꼰 레제 뻬께뇨와 또르티야 그리고 물 한 병을 주문했지만 또르티야는 팔지 않는다고 한다. 바르에 또르티야가 없다니? 주인장 아주머니는 대신 계란 오믈렛 샌드위치를 권한다. 고개를 끄덕이곤 계산을 했다. 주머니가 동전으로 묵직하였기에, 유로 동전을 골라 하나씩 바 위에 내려놓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개,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 그러나 아주머니는 아직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다. 여섯 개, 아직이다. 일곱 개째를 내려놓아도 도통 주인장의 표정은 만족할 줄 모른다. 얼마인지 계산기에 찍어 달라 하였더니 7.50을 보여준다. 생각보다 많은 금액에 잠시 당혹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모양이다. 주인장의 얼굴엔 익숙하다는 표정이, 그리고 항의를 해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표정과, 그렇게 되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결의가 함께 엿보인다. 고개를 끄덕이며 10센트 동전 세 개와 20센트 하나를 골라내어 내려놓자 그제야 그녀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지나간다.
공급이 적으면 가격이 올라간다는 시장 경제의 법칙이 충실히 적용되는 곳이다. 위치상의 이점을 톡톡히 보려나 보다. 하긴 프랑스 길에 비해 많지 않은 순례자들의 수를 고려할 때, 또 비수기를 생각한다면 성수기에 바짝 벌어들여야 하리라. 순례길이 시작되었다는 먼 옛날 9세기쯤부터도, 순례자들로부터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려는 여관 주인은 항상 있어왔을 것이었다.
하지만 내 짧은 생각으론 7.50을 부르며 불안과 근심 어린 표정을 짓는 건, 너무 적은 돈에 마음의 평화를 잃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니 나도 불과 몇 유로에 잠시 분개하며 행복을 잃었던 것이었다. 필요할 때 커피를 마시고 앉아 쉬었으니 그저 감사하게 생각했으면 될 일이었다.
곧 길이 갈라짐을 알리는 표지석과 마주했다. 어제 생각한 대로 무시아 쪽 방향을 잡았다. 이번엔 동전조차 던지지도 않았다. 왜 피스테라로 가지 않고 이쪽으로 가느냐 묻는다면, 굳이 대단한 이유는 없다. 피스테라를 먼저 가고 무시아로 가는 게 전통이라던데 그냥 그런가 보다 할 뿐이다.
아름답다는 쎄 Cee를 거치지 않는 게 약간 아쉽지만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마테오와 안젤라가 역시 이쪽으로 간다기에 기분이 좋았다. 이 둘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훈훈해지는 커플이다.
바람이 나무들 사이를 세차게 지나가, 흔들리는 잎사귀엔 벌써부터 파도 소리가 났다. 하지만 아직 바다의 짠 내음은 느껴지지 않는다. 바다가 보고 싶어 급한 마음은 이미 다 가있건만, 거리는 좀체 줄어들지 않는다. 그래도 계속 걷고 있으므로 결국 시간이 가면 닿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표지석이 드디어 무시아 10km 안쪽으로 들어왔음을 알렸다. 언덕이 없다면 눈에도 보일 거리이건만 화살표는 이리저리 나를 이끌기만 할 뿐 아직 바다로 보내주질 않는다.
드디어 바다가 보이고, 이제 해안선을 끼고 걷는다.
철썩이는 파도가 발걸음에 박자를 맞추었다. 역시 마지막 남은 몇 km는 가장 길게 느껴진다.
무시아 도착.
무시아의 공립 알베르게 입구에는, 이제 쓸모를 다한 나무 지팡이가 한 아름 남겨져 있었다. 피스테라에서 무시아로 온 순례자들이 남기고 간 것들이다.
마테오와 안젤라는, 나보다 약간 먼저 도착한듯하다. 막 들어서는 길에 바깥으로 나오는 둘을 만났다. 함께 사진을 찍으러 가기로 했다. 배도 고프지만 지금 우리는 0km 표지를 얼른 보고 싶어 안달이었다.
언덕에서 바닷가로 뻗은 로마시대의 도로를 걸어, 그 끝 무시아 0km 표지에 도착했다. 신이 나서 잠을 설쳤어도 피곤한 줄을 몰랐다. 우리가 가장 먼저 도착했기 때문에 사람도 별로 없고 사진을 찍을 여유가 많이 있었다. 기쁨을 만끽하며 사진을 남겼다.
하지만 완전히 긴장을 놓을 때는 아니다. 아직 피스 테라로의 하루치 걸음이 남아있었다.
등대를 내려다보며 음식을 나누었다. 간단한 피크닉을 마치니 파랗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심상치 않게 검어졌다.
별러왔던 수영은 생략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한 방울 두 방울 비가 느껴지고, 알베르게에 닿자마자 후드득 비가 굵어졌다. 먼저 사진을 찍으러 간 것도 좋았고 돌아오기로 한 것도 좋은 선택이었다.
알베르게 리셉션에서 무시아 순례증을 받았다. 수기로 이름을 적어주었다.
다들 사 먹는 것도 별로인 눈치고 간단히 때울 저녁으로 소시지를 사다 굽기로 했다. 주방 집기가 하나도 없으므로 알루미늄 용기를 사다가 구웠다. 오늘만 이렇게 구워 먹는 거니 집에선 절대 하지 말라고 둘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맛이 없었는데 둘 다 너무 고마워하며 먹는다.
내일이 드디어 마지막 날이다. 아까는 흥분에 피곤한 줄 몰랐지만 이젠 점점 몸이 쳐진다. 하지만 오늘 밤도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비바람이 거세어 바깥에선 전깃줄 우는 소리가 웅웅 들려왔다.
올베이로아 - 무시아
06:10 - 1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