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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번만 더 May 18. 2024

42. 세상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35일 차, 무시아 - 피스테라 27.8km

[무시아 - 피스테라 길 5편]


9월 5일 화요일, 마지막 걷는 날


역시나 피곤한 가운데도 깊은 잠엔 들지 못했다. 졸다 깨다를 반복하다 두시 반쯤 모기에 한방 물려 손등을 벅벅 긁었다. 그리고 다시 잠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나지막이 코를 고는 옆 사람이 부러웠다. 비는 그쳤지만 바람이 계속 거세게 불어 창문이 흔들릴 정도다. 바깥을 내다보니 가로등이 휘청대었다. 오전 11시경부턴 비가 온다는데, 일찍 나서야 할까? 누워서 머릿속으로 시간과 거리 계산만 반복했다. 네시, 다섯 시, 밤새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다시 잠들긴 글렀고, 비가 오기 전에 조금 더 걸어야겠다 결단을 내려 가방을 챙겼다.


아직 아무도 보이지 않는 거리에 홀로 나서 이정표를 찾았다. 파도는 맹렬하게 해변을 두들겼고, 바람에 밀리며 한참을 걸어 해안도로를 벗어나 산길로 올라섰다. 바람이 어찌나 센지 풍력 발전기가 돌며 비행기 지나가는 소리를 냈다. 점차 눈이 감기고 몸이 차가워지며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비몽사몽 하며 지팡이에 의지해 한 걸음씩 거북이걸음을 걸었다.



어느새 프랑스인 노부부가 나를 지나쳐갔다. 쓰러질 듯 아주아주 천천히 걷는 나를, 괜찮은지 어떤지 유심히 보고 지나갔다.



힘겹게 산을 넘으니 아주아주 작은 바르가 하나 있었고,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 들어가 앉아 커피를 모처럼 큰 잔으로 시켰다. 천천히 커피를 듬뿍 마시고 군것질거리를 하나 사 바르를 나섰다. 많이 걷지도 못했는데 이미 8시 반이 넘었다. 카페인 기운을 빌어 30분쯤 서둘러 걸었다.



무언가 생각에 잠겨 걷다 아뿔싸 또 길을 잘못 들어 버렸다. 그래도 멀지 않으니 다시 돌아가면 그만이다.



9시가 약간 넘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길을 잃은 대가로 한 시간을 허비하여 까미노 위로 돌아왔고, 비를 피하기 위해 지붕과 벽이 있는 버스 정거장에 들어가 앉았다. 잠시 쉬면 비가 좀 그칠까 그대로 기다렸다.


자리에 앉으니 눕고 싶어 졌고, 등을 대고 누우니 잠이 솔솔 왔다. 나도 모르게 얼마 정도 정거장 안에서 눈을 붙였다. 30분쯤 지나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에 흠칫 깨어 바깥을 살폈다. ​



비는 여전히 많이 내리는데 바람만 약간 잦아들어, 우산을 펴고 길을 나섰다. 정신이 덜 들어 마을 골목길도 한참을 헤매다 벗어났다.



이렇게 한마을을 전진하니 자판기가 있는 쉼터가 보였다. 이때가 10시 50분. 들어가 앉아 물을 한 병 뽑고 배터리를 충전하며 쉬었다. 비바람이 조금 잦아들기를 기다리다 한 시간 반을 보내버렸다. 여태 우비 없이 잘 왔는데 기어코 마지막 날에 고생하게 되는구나 싶었다.



한 시간 있으면 날이 갠다고 하던 일기예보 앱은 자꾸만 예보를 구름에서 비로 변경하고 있었다. 그칠 것 같지 않아 결국 마지못해 다시 빗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피스테라에서 무시아 쪽으로 오는 케빈을 만났다. 하와이 출신의 케빈은 아스토르가에서 처음 만난 이후 길 위에서 꽤나 자주 만났다. 새벽 일찍 출발한 케빈을 항상 길 중간쯤에서 따라잡곤 했었다. 엘 아세보를 넘으며 거리가 벌어져 한동안 못 만나다가, 산티아고에는 같은 날 들어왔다. 그리고 피스테라와 무시아 중간에서 만났으니 이제는 이게 마지막이다.



중간중간 반대쪽에서 오는 반가운 얼굴들을 만났다. Lires를 조금 지나 올가와 다시 만나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옷이 젖는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꼭 안아주고 서로의 등을 두드렸다. 여태 잘 해냈으니 오늘 마지막 날도 잘할 거라고 서로를 자랑스러워하였다. 서로 반대쪽으로 멀어지는 마지막 뒷모습에 계속 손을 흔들었다.


올가와 헤어지고, 더 이상 비에 젖는 게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 옷 빨아서 내일 다시 입을 일도 없고, 도착하면 피스테라 바다에 뛰어들어 흠뻑 젖을 심산이었다. 우산을 접어 가방에 넣어버리고 해변길을 따라 걸었다. 왜 오전 내내 비가 그치길 기다리며 쉬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제야 원망스럽던 비가 아름답게 보였다. 비가 와야 맑은 날씨가 고마운 줄 알고, 또한 고생이 커야 보람이 큰 것이다. 8월 내내 맑았던 그 어느 날보다 오늘이 가장 좋은 날이었다.


우산을 접으니 그제야 걸음이 빨라졌다. 일직선으로 뻗은 바닷가 도로를 서둘러 걸어 내려갔다. 거리가 빠르게 줄어들었고, 피스테라에 도착할 무렵 비가 가늘어졌다.


프랭크의 마지막 모습? 아니다

피스테라에 들어와 프랭크를 마주쳤다. 보자마자 반갑게 빅 허그를 하는 건 여기의 기본 인사. 그는 하루를 더 머물고 무시아로 가겠다 한다. 나는 이제 스틱이 필요 없어 한쪽을 마저 가지라고 하니, 아니라며 그때 쥐여준 한쪽을 다시 돌려준다.



사진 오른쪽에 있는 인물은 조니이다. 노숙과 탁발, 걸식으로 365일 까미노를 걷는 기인이다. 온타나스에서 처음 만나 나에게 또르띠야를 탁발받아 간 그다.(D+17편) 그때는 이니셜 제이로 소개했는데, 이제는 이름을 밝혀도 되겠다 싶다. 그가 상의로 걸치고 있던 천이 사아군 들판의 말뚝에 걸려있는 것을 발견하였었다. 걱정하였지만 무사히 길을 걷고 있더란 소문을 전해 들었었고, 마침내 여기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해변에서 불을 피우고 노숙 중이었으며 역시 한 무리의 젊은 순례자들이 그때와 마찬가지로 그와 어울리고 있었다. 조니가 해가 저물면 왼쪽 해변가로 오라고 한다. 거기서 불을 피워 요리를 하고 모두 음식을 나눠 먹고 어울릴 예정이라고 한다.



이곳, 세상의 끝 피니스테라는 순례자들의 마지막 만남을 위해 예비된 곳이다. 그렇다고 모두를 다 보여주진 않는다. 가장 원하는 사람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가장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 그리고 궁금했던 사람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잠시 공립 알베르게에 들러 완주증을 받고, 등대가 있는 피니스테라로 마지막 걸음을 재촉했다. 이제는 정말 끝이 다가온다. 등대로 가는 마지막 5km의 구간에서 가슴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때마침 비가 그치고 거짓말 같이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늘 그래왔듯이 나는 가장 좋은 때에 걸었으며, 완벽한 때에 도착한 것이다. 지금의 파란 하늘이 더욱 아름다우라고 하루 종일 비가 왔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엔 마테오와 안젤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객들은 순례자들이 마음껏 기뻐할 수 있도록 기꺼이 사진 찍을 차례를 기다려주었으며, 우리는 길의 끝이자 출발, 0km를 알리는 표지석 앞에서 얼싸안은 채 함께 웃고 울었다.


혼자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라 에스피랄 La Espiral 알베르게는 투숙객들에게 세심한 배려를 하려 노력하는 그런 곳이다. 스태프들은 친절하고 시설 이용에 불편함이 없다. 숙박은 15유로이고 테이블에 잔뜩 과일, 간식이 깔려있다. 아침식사는 기부제로 이용 가능하다. 물론 나는 내일 일찍 떠나므로 아쉬운 일이다.

한 달 넘게 입어온 한 세트의 옷과, 양말, 속옷, 팔 토시, 장갑을 허물처럼 벗어 쓰레기통에 넣었다. 뜨거운 물을 맞으며 샤워를 오래오래 했다.



여기 알베르게는 번호 도어락을 이용해 자유로운 출입이 가능하다. 피스테라 공립 알베르게는 통금이 7 시인 관계로 인기가 좀 적다. 어울릴 친구들이 있다면 피스테라 숙소는 통금 시간을 보고 고르셔도 좋겠다. 마테오와 안젤라가 이틀을 보내려는 호텔은 하루 숙박 60유로 대이다.



저녁은 마테오가 원하는 대로 피자+맥주를 먹기로 하였다.  이 정도면 순례길에서 스페인 음식보다 이탈리아 음식을 훨씬 훨씬 더 많이 먹었다. 빠에야는 딱 한 번 인가 두 번 먹은 듯하다.


커다란 피자를 일인 일판씩 시켰다. 바삭하게 구워진 피자가 괜찮은 집이다. 이 정도면 매우 훌륭하다고 앞에 앉은 두 피자 인증기가 인정했다. 승리의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키며 ‘이제 뭐 할 거냐’ 고 묻는 마테오에게 ‘이제 집에 갈 수 있게 되었네’라고 대답했다.


프랭크가 갑자기 들어와 어느 테이블에 합석하는 게 보였다. 저 사람은 어디 가도 또 만날 것 같다. 저 프랭크의 합석 능력이 아니었다면 나는 올가를, 줄리엣을 만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천천히 저녁을 즐기고 날이 어두워지자 셋이 해변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아까 사둔 까바를 꺼내어 마지막 축배를 들었다. 코르크가 아니라 스크루 탑인 게 옥에 티. 하지만 그 무엇인들 어떠랴,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소중한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숙소로 데려다준다고 하다 결국 시내를 한 바퀴 더 걸었다. 모두 헤어지기가 못내 아쉬운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일 산티아고, 비고를 거쳐 포르투로 이동하므로 여기서 작별을 고했다. 숙소로 돌아와 긴 하루를 마쳤지만, 역시나 쉽게 잠에 들지 못할 것 같았다.

무시아 - 피스테라 - 피니스테라

5:30 - 15:30 -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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