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인 줄 알았던 오후 # 행성 -20
주말 오후, 도서관에 갔다.
햇살은 창문을 따라 길게 들어왔다.
도서관 의자들은 대부분 채워져 있었다.
빈자리를 찾아 조용히 앉았다.
책을 펼치자, 종이 냄새가 스며들었다.
조용히 한 장 한 장 넘기며
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앞자리에 누군가 앉았다.
도서관에서
바로 앞에 누군가 앉은 건 처음이었다.
일어나서 다른 곳으로 갈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냥 앉아서 신경 쓰지 않고
읽던 책을 마저 읽었다.
어느새 책에 대한 집중 흐트러졌다.
그리고 주변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내 앞에 앉은
낯선 이의 숨소리부터 시작됐다.
크게 들린 것도 아니고,
신경 쓰일 만큼 거친 것도 아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밥상만큼 가까운 거리에
낯선 사람이 앉아 있던 적 있었나?
누군가의 숨소리를 듣는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평소엔 이어폰을 끼고
상대의 소음을 차단한다.
낯선 사람의 숨소리가
귓속으로 들어오는 게 이상했다.
책에 집중하려고 할 때마다
미세하게 섞여 들어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쁘지는 않았다.
책을 덮었다.
이렇게 된 김에 소리에 더 집중했다.
도서관에는 완벽한 정적이 없었다.
책장을 사부작 넘기는 소리,
연필이 종이를 긁는 소리,
누군가 코를 훌쩍이는 소리,
텀블러 뚜껑이 열리는 작은 마찰음,
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지이잉 하고 울리는 진동.
아주 작고 아주 낮은
살아 있는 소리들.
이름도, 사연도 모르는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에,
각자의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그 안에 내가 있다는 게
묘하게 안심이 됐다.
나는 그동안
방해받지 않는 공간을 원했던 건 아닐까.
어쩌면 내가 원하던 공간은
살아 있는 공간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됐다.
완벽한 정적과
완벽한 고요는 없는 것 같다.
도서관의 소음은 사람들이 숨 쉬고,
각자의 페이지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 거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내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도
섞여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됐다.
내가 의자를 살짝 밀 때 나는 마찰음,
펜을 떨어뜨릴 뻔해 급히 잡는 소리,
목이 말라 물을 한 모금 마시는 소리까지.
그 모든 것이 이 공간에 있었다.
나는 혼자였지만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다.
말을 섞지 않아
같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말을 섞지 않아도
같은 방향,
같은 시간 위에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덜 무거워졌다.
도서관을 나서며
앞에 앉았던 사람을 보았다.
고개를 숙인 채 공부를 하는 학생이었다.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
아마 앞으로도 모르겠지.
그런데 숨소리는 이상하게 기억에 남았다.
살아 있다는 건
거창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와 같은 공간에서
작은 소음을 내며 페이지를 넘기는 것.
그 사이에
내 소리도 섞여 있다는 걸 느꼈다.
아, 나도 살아 숨 쉬고 있구나.
그날 도서관에서
나는 조용한 소음 속에 섞여 있었다.
행복은 거창한 일이 아니라
누군가의 숨소리와 함께
섞여사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날 나는
도서관의 조용한 소음 속에서
살아 있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오늘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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